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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중공간

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1

3; 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 (효용)





  


● 진리의 가치를 논의할 필요성 


○ 진리가 도대체 어떤 가치를 갖는가.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기 전에
진리가 어떤 가치를 갖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도대체 왜 진리를 추구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판단을 통하여
정말 가치가 있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진리가 갖는 가치를 분명히 안다면
진리에 보다 가까워지려는 동기와 의지를 더 많이 갖게 되고, 

진리를 보다 많이 얻으려 노력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그 과정까지 즐겁게 만들어
즐겁게 행하고
즐겁게 진리를 얻고
또 그 내용을 즐겁게 잘 실천할 수 있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진리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힘들더라도
얻어야 하고
또 얻으려 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어떤 때는 무언가를 새로이 알고 배운다는
그 자체가 즐거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 진리가 또 가치있는 것은
진리를 아는 만큼
그 만큼 자신의 희망을 성취시킬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경험 때문일 것이다. 





□ 진리를 얻는 과정은 힘든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모르는 지식은 다 방면으로 있고
그 분량도 상당하다.

그리고 모든 분야의 지식을
한 인간이 다 섭취하고 소화하는 것은
사실 힘든 일이다.

예를 들어 어린이가 수학을 배우고,
물리현상의 법칙을 이해하기까지 드는 노력을 생각하면
쉽게 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진리 또는 진리를 안다는 것은 힘들지만
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매우 높은 의미를 둔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상태로서 깨달음의 상태를 강조한다.

그밖에 모든 학문 분야에서도
공통적으로 진리에 대해 가치를 둔다.
그리고 일반 생활에서도
진리가 매우 소중한 것임을 쉽게 인정한다. 


그것은 진리를 아는 만큼
자신의 희망을 성취시킬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경험 때문일 것이다. 





  


○ 다만 그렇다 해도 모든 진리가 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곤란하다. 


△ 예를 들어 매우 긴 시간을 들여 

방안에 있는 책이나 먼지의 수를 세어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것이 비록 정학히 옳다 해도
그것을 통해 자신도 즐거움도 얻지 못하고
남도 즐거움을 얻게 하지도 못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쓸모나 가치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 그래서 어떤 지식이 어디에도 쓸모없는 것인 동시에,
그 내용이
그 당사자에게도 어떤 만족감이나 가치감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상태로 남을 수도 있다.
이처럼 어떤 진리는 진리이기만 하면
모두 가치있다는 믿음과는 달리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 이런 경우에는
지식이 결과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리고 어떤 진리가 진리임에도 별다른 쓸모가 없다면
그런 진리를 얻으려는 노력 자체도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진리가 어떤 면에서 가치를 갖는 지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 /K/9Z/K2390.hwp 가치의 문제

끝 구 링크 http ://blog.paran.com/truth007/18450010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1 

구 링크     http  ://blog.paran.com/truth007/18450002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2





2. 진리의 가치 



일반적으로 진리는 다음과 같은 점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받고 그것이 추구된다. 먼저 진리는 어떤 주체가 어떤 이유에서든 이에 대해 좋음을 느끼거나 좋다는 가치판단을 하게 되면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게 된다. 그것은 가치를 갖는 다른 것들이 처음 가치를 갖게 되는 과정과 마찬가지다. 한편 진리는 알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있을 때 지적 호기심을 해소시켜 만족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다. 그리고 다시 올바른 가치평가나 목표설정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가치를 갖기도 한다. 또 진리에 기초하여 설정된 목표의 실현가능성 유무를 판단할 수 있고 진리에 기초해 목표를 설정하면 그 목표의 실현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기도 한다. 또 진리는 목표의 쉽고 빠른 실현 방안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기도 한다. 한편 진리를 체득하면 그로 인해 보다 가치 있는 형태로 인격전반과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점에서 가치를 갖기도 한다. 아래에서는 이런 측면에서 진리가 갖는 가치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가. 진리의 가치의 최초의 발생 





철학적으로는 진리가 곧 가치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예: 소크라테스 지덕체합일설] 그러나 진리와 가치가 각기 뜻하는 의미는 서로 구별된다. 따라서 이 입장에는 찬동하지 않는다. 





다만, 진리를 아는 상태에 대해 어떤 근거에 의해서든 그것으로부터 좋음을 느끼거나 의식적으로 좋다고 판단을 하면, 이로써 곧 진리는 가치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진리를 얻는 상태에서 좋음을 느낄 수 있다. 또 어떤 진리를 갖는 상태를 다른 상태에 비해 좋다고 여길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바로 이런 관계를 기초로 진리는 가치를 갖게 된다. 


이는 진리의 가치가 다른 것의 좋음에 기초하여 얻어지지 않고, 가치를 자체적으로 독자적으로 처음 갖게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로 진리가 가치를 갖는 경우, 진리가 왜 좋은 것인가라고 물으면 ‘진리는 좋으니까 좋다’라는 식으로 대답하게 된다. 즉, 진리가 다른 좋은 것에 도움이 되니까 좋다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경우와는 다름을 뜻한다. 





그리고 이렇게 진리가 가치를 갖는 경우는 다른 사물이나 상태가 처음으로 가치를 갖게 되는 과정과 같다. 진리가 처음 독자적으로 가치를 갖게 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는 것들이 처음 어떻게 가치를 갖게 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금은 가치를 갖는다고 널리 인정을 받는다. 그런데 금은 무엇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인가? 금이 가치가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금이 가치를 갖게 된 원인으로 먼저 그 금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성질에 주목하게 된다. 즉 금은 다른 사물이 갖지 않는 어떤 자체의 독특한 속성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라고 우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금만이 갖고 있는 색깔, 잘 변치 않는 특성, 상대적 희귀성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금의 가치는 금의 갖는 색깔, 단단함과 같이 그 성질로서 금에 붙어 있는 것이라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가치는 색깔이나 단단함과 같이 감각기관을 통해 직접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또 어떤 다른 물체 등과의 관계에서 일정하게 나타나는 성질도 아니다. 따라서 이에 동의할 수는 없다. 





한편 만일 이처럼 금의 가치가 금이 갖는 객관적 성질 때문에 오로지 발생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그 객관적 성질이 유지되는 한, 각 주체나 시기 상황별로 그 내용이 변하지 않고 그 가치가 일정하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금이 모든 주체에게 또 언제나 일정하게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선 금에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많은 생명 가운데 사람에 한정된다. 예를 들어 소나 말은 금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 사람에 있어서도 금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 금에 가치를 인정하는 정도도 사람마다 다 조금씩 다르다. 또 금에 가치를 두는 사람도 어떤 때는 가치를 두고 또 어떤 때는 두지 않는 등의 변화가 있게 된다. 이처럼 주체별로 시기 상황별로 가치의 유무나 정도가 변동된다는 사실은 금의 가치가 오로지 금이 갖는 객관적인 특성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또 이는 어떤 가치가 객관적 상태에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반대로 어떤 것의 가치는 그 가치를 인정하는 일정한 주체, 그리고 일정한 상황과 관계하여 매우 유동적인 상태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한편 가치는 비록 그 대상의 객관상태에 기초하지만, 그 내용은 최종적으로 그것을 인정하는 주체의 주관적 판단 안에 자리 잡게 된다. 즉 가치를 느끼고 인식하는 것은 주체의 정신 안에서다. 그래서 이런 점에 주목하여 가치는 오로지 그것을 인정하는 주체의 주관상태에 기초하여 나타난다고 생각할 입장도 있다. 만일 정신만이 가치를 발생시킨 원인이라면, 각 주체는 외부 객관상태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가치를 생성하고 유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각 가치의 내용은 각 대상의 객관적 특징보다는 각 주체에 따라 고유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물론 앞의 입장과 같이 주관의 정신상태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오로지 정신만으로 가치가 발생한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왜냐 하면 한 주체가 가치를 인정할 때는  각 사물이나 상태가 갖는 각각의 특성에 의존하여 가치를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등의 차별을 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특성은 정신보다는 외부 대상에 속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그런 특성도 엄밀하게 보면 대상 자체와 정신이 관계하는 과정을 통해 ‘정신’쪽에서 파악한 내용이기는 하다. 그러나 대상들이 각기 갖는 차별적 특성은 정신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내용이라기보다는 외부 대상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추리하여야 한다. 따라서 오로지 주관의 마음만으로 가치를 차별지어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리고 각 개인들이 인정하는 가치의 내용은 비록 각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외부 사물의 차이에 따라 공통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는 가치가 외부대상의 객관적 특징과 관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가치는 주관과 객관의 어느 하나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물론 앞에서 보았듯 가치는 정신내용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신 단독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가치는 객관과 주관이 서로 관계하고 화합하는 가운데 정신 안에 나타나는 정신내용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외부 사물이나 상태와 결부되어 정신에서 얻어지고 또 그 내용은 그런 대상을 향한 내용물로 된다. 이는 마치 막대와 그릇이 마주칠 때 소리가 나오는 관계와 같다. 막대만으로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릇만으로도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이 서로 부딪히면 이들이 화합하여 그 각각에서 각기 혼자만으로 얻어지지 않던 소리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막대의 입장에서는 그 소리는 그 그릇과 부딪힐 때 얻어진 독특한 소리로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막대 입장에서는 다른 물체와 부딪힐 때는 또 다른 소리를 얻는 관계에서 그런 차별을 두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화합하여 얻어진 결과물이 갖는 본질을 화합에 관계한 각각의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에만 귀속시킬 수는 없다. 각 요소에는 화합해 얻어진 결과물이나 그 성질들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수소와 산소가 화합하여 물이 나온다고 할 때, 수소에도 산소에도 물의 모습이나 성질은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물과 물의 성질은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고 화합하면 나타난다. 또 모래나 종이 등과 같은 다른 것들이 서로 결합하고 관계할 때는 나타나지 않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화합하여 새로운 성질이 나타나는 것은 깊이 생각하면 매우 신비스러운 현상이다. 왜 화합 전의 요소들에서는 찾을 수 없던 성질들이 화합 후에는 나타나는 것인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낼 도리는 없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얻는 지식은 단지 그런 현상이 그런 경우에 반복해 얻어진다는 내용뿐이다. 여기에 가장 적절한 설명이란 그저 그런 경우에는 으레 그렇게 된다는 식의 설명뿐이다. 





그리고 정신이 외부대상과 관계하여 감각내용을 얻고 개념내용을 얻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정신내용을 기초로 가치를 느끼는 과정도 앞의 예들과 같이 대상과 주관이 서로 화합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대상과 주관이 관계하여 처음 감각내용을 얻고 그 감각내용을 기초로 좋은 느낌과 관념 판단 들이 정신 안에서 후발적으로 일어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금이나 식품 의복 등등에서 처음 가치가 나타나는 관계도 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어떤 주체가 어떤 상황에서 무언가를 상대하여 좋음을 화합을 통해 느끼거나 판단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최초로 ‘가치’가 나타나는 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좋음이 발생하는 근원을 ‘이런 요소들이 이런 조건에서 화합하여 그것이 나타났다는 사실’ 이외에 또 다른 근원이나 근거를 제시하기는 힘들다. 단지 그런 조건에서 그렇게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러이러하다’라고 인정할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가 어떤 다른 가치에 기초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가치를 처음 갖게 되는 관계도 앞에서 밝힌 관계와 같은 구조로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리에서 가치가 나타난다는 것은 진리가 갖는 가치가 진리의 고유한 본질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금의 가치가 금이 갖는 색깔처럼 금이 갖는 고유한 특성은 아니라고 이해하는 앞서의 입장과 같다. 그것은 주관과 대상이 일정한 상황에서 화합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며, 이런 관계로 구체적으로 어떤 진리에서 가치가 나타나는가 안 나타나는가는 상당히 유동적일 수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특히 ‘진리’의 ‘가치’를 논의하는 가운데 진리와 가치의 성격 차이를 명백히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금은 노란색이다’라는 판단[사실판단]과 ‘금이 좋다’라는 판단[가치판단]이 갖는 성격상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에 의하면 노란색에 대한 감각내용이나 좋음의 느낌이나 관념, 판단 모두 화합과정을 통해 얻어진 정신의 내용물이다. 그런데 노란색과 같은 감각내용은 최소한 유사한 감각기관을 갖는 주체간에서는 공통적으로 다 함께 그 내용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내용이면 참이 된다. 또 이에 명백히 어긋난 내용은 거짓이 된다. 그런데 좋다 나쁘다 등의 느낌이나 가치판단의 내용은 이들 주체간에서도 공통적인 내용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참거짓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이들 판단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그런데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갖는 이런 차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사실판단도 엄격히 보면 모든 주체에 보편적으로 그 내용을 인정받는다고 단정하기는 힘든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금이 노란색임- 적어도 하얀색과 구별되는 다른 색임 - 등은 정상적인 눈을 갖고 있는 주체들 간에서는 공통적으로 승인받는 금의 ‘객관적’ 성질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세하고 엄밀하게 보면 여기에도 일정한 한계는 있다. 우선 어떤 사람이 얻는 감각내용 즉 노란색깔의 감각내용을 제 3자가 직접 꺼내 확인해볼 도리는 없다. 따라서 모든 주체가 동일한 노란색의 감각을 정말 얻는 것인지를 엄격히 단정해 확인할 도리가 없다. 따라서 어떤 대상에 대해 모든 주체가 공통적으로 동일한 어떤 내용을 얻는다는 의미에서의 객관성은 엄격하게는 얻어질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주장은 끝내 입증될 수 없는 가설로 남게 된다. 더 나아가 왼쪽 눈, 오른쪽 눈, 색안경을 낀 눈, 눈동자색깔이 각기 다른 사람들의 눈, 눈이 색약 또는 색맹인 사람, 장님인 경우 등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다 공통된 색깔을 받아들이리라고 추정하기도 어렵다. 더 나아가 각 생명체 예를 들어 개, 뱀, 또는 곤충의 겹눈 등까지 다 포함하면 이는 더욱 어렵게 된다. 또 대상과 감각기관은 일정하게 유지해도 다시 빛이 밝고 어둡고 특별한 색조명이 비춰지는 등등의 모든 상황의 변화를 고려하면 이런 공통성을 확보하기는 더욱 어렵게 된다. 그래서 일정 대상에 대해 모든 주체가 모든 상황에서 모두 다 동일한 감각내용을 얻어 어떤 사실판단의 내용을 공통적으로 승인할 수 있게 된다고 추리하기는 곤란하다. 





그럼에도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차이를 설정하는 것까지 곤란하지는 않다. 앞에서 본 사유로 사실판단에서도 엄격한 객관성을 주장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적어도 범위를 좁혀 정상적인 눈을 가진 보통의 사람들이 일반적인 조건에서 서로 유사한 정도의 감각내용을 얻는 것은 언어를 통한 의사교환을 통해 추정받을 수는 있다. 그런데 가치판단은 이런 범위내에서도 함께 공통된 내용을 얻는다는 추정을 끌어내기 어렵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은 구별되는 것이다. 다만 앞에서 살핀 것처럼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구별에 그친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는 있다. 








<참고>-백과사전에서의 가치에 대한 설명   


가치판단 (價値判斷 value judgement)


요약


보통판단이 사실상의 관계를 표시하는 데 반해 어떤 사실에 대한 주관의 가치의견을 나타내는 것.


설명


보통판단(普通判斷)이 사실상의 관계를 표시하는 데 반해 어떤 사실에 대한 주관의 가치의견을 나타내는 것. 즉 전자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순수한 이론적인 두 개념내용 사이에 논리적 또는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관계이나, 가치판단에 있어서는 주어개념에 대하여 평가주관(評價主觀)에 의한 시인(是認) 또는 부인의 가치술어(價値述語), 즉 유용(有用)·정(正)·선(善)·미(美) 등을 술어로 갖는다. 





가치판단이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는 


가치 자체를 


단순히 주관적이며 우연적인 쾌(快)나 불쾌(不快)의 감정에 그치는 것으로 보느냐(자연주의적 입장), 


아니면 경험주관을 넘어선 객관적인 본질로서의 가치가 초월적으로 존립한다고 보느냐(현상학적 입장) 


또는 선험적(先驗的) 주관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느냐(칸트주의적 입장)에 따라서 그 견해가 달라진다. 


W. 빈델반트는 이론적 인식판단까지도 진리가치의 관계에 의하여 제약되는 한 선험적인 가치판단을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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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기준 (價値基準 value criterion)


요약


가치선택이나 가치판단의 준거가 되는 원리.


설명


가치선택이나 가치판단의 준거가 되는 원리. 


주관주의자들은 가치기준을 개인의 욕구나 필요 등 가치평가자의 주관적 요인에서 구하고 있는 반면에 


객관주의자들은 가치기준을 개인의 취향이나 태도에 관계없이 성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치기준에 대해서는 그것이 개인이나 집단의 태도 혹은 시간적·공간적 상황에 따라 달리 결정된다는 상대주의적 주장도 있고, 


시간적·공간적·상황과 개인 혹은 집단의 요구에 관계없이 영원불변하는 것이라는 절대주의적 주장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와 아리스티포스, 19세기의 J. 벤담과 J.S. 밀 등의 쾌락주의에서는 개인이나 사회에 제공되는 쾌락의 양 혹은 질에서 가치기준을 구하고 있다. 


I. 칸트와 F. 브렌타노 등의 직관주의(直觀主義)에 의하면 가치기준은 직관적 통찰을 통하여 인식된다. 


플라톤이나 헤겔 등의 관념주의에서는 이성(理性)에 의해 획득되는 규준 혹은 이상에서 구하고, 


J. 듀이 등의 자연주의에서는 생물학적 적응과 생존에서 구하고 있다.








가치론 (價値論 theory of value)


요약


가치판단과 가치평가 등을 중심문제로 하는 가치철학.


설명


가치판단과 가치평가 등을 중심문제로 하는 가치철학. 





가치론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철학의 한 분야로서 가치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불과 19세기 말부터이다. 그 정신사상(精神思想)의 배경에는, 근대 서유럽의 전통적 가치관인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이 무력하고 무의미하게 되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실감(實感)이 있다. 이를 가장 명확하게 공언한 것은 독일의 철학자 니체로, 그는 현대를 <2000년에 걸쳐 그리스도교도였다는 것에 대한 보상(報償)을 해야만 하는 시대>로 보고, 종래의 <일체의 가치의 전도(顚倒)>를 제창하였다. 이러한 전통적 가치에의 절망의 시기가 철학적 가치론의 발생기에 해당한다. 





원래, 가치라고 하는 말은 경제학상의 용어로 명확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철학적 가치론도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A. 마이농·에렌펠스·크라이비히 등이 경제학상의 가치논쟁과 연관시켜 논쟁을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의 가치론자는 가치를 인간생활, 특히 인간의 욕망·감정과 불가분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가치란 욕망과 감정의 대상>이라고 하는 설을 자연주의 혹은 심리주의라고 부르는데, 이런 종류의 가치는 본래 경험주의가 유력했던 영국·미국과 스칸디나비아 제국에서 주된 조류가 된다. 


철학적 가치론의 발상지인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브렌타노류(流)의 심리주의를 벗어나, 가치를 감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객관적·절대적인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해진다. 


가치란 주체의 욕구에 제약을 받는 일이 없는 <단적인 가치로 찬 것>이며, 재물과는 구별되는 선천적인(아 프리오리;a priori) 가치질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M. 셸러를 주된 창도자(唱導者)로 하는 절대주의적 가치객관주의가 성립된다. 





한편 가치가 물과 구별되는 이념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가치의 질서나 체계 등은 존재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은 궁극적인 가치관의 대립, <정신의 다툼(M. 베버)>이라고 생각할 때 절대주의적 가치다원론(多元論)이 성립된다. 





이념주의가 우세한 독일어권의 가치론은 절대주의적 경향이 강하지만, 


경험주의적 전통하에 있는 영미권에서는 가치론도 경험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이다. 특히 20세기 영·미의 가치론은 가치를 욕구의 대상이라고 하는 자연주의와 함께, 가치란 사실과는 구별되는 인간의 감정이나 행위의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주관주의가 유력해졌다. 


이것은 가치는 판단의 주체인 개인과 집단에 의존한다고 보는 상대주의와 결부되어 현재의 가치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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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끝> 





끝 http://blog.paran.com/truth007/18450002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2





http://blog.paran.com/truth007/18449993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3





앞에서 진리에 대해 처음 가치가 나타나는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진리에 대해 좋음을 느끼는 경우는 좋은 색깔, 소리, 냄새, 맛, 부드러운 접촉 등과 같이 감각작용에서 좋음의 느낌을 얻는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진리 획득과정이 일정한 개념을 기초로 기억, 재생, 비교, 분석, 종합, 판단, 추리과정 등의 비교적 고차적 정신작용을 통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복잡한 수학문제에서 답을 얻거나, 또는 일식이나 월식 조수간만 지층의 구조 등을 이해하여 얻는 좋음이란 감각에 기초한 쾌감보다는 복잡한 경로를 거쳐 얻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리획득과정과 그 결과물인 진리에 대해 좋은 느낌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어떤 게임이나 경기에 몰두하여 좋음을 얻는 것처럼 진리를 추구하고 획득하는 과정에도 심리적으로 좋음을 느끼는 경우는 있다. 


그래서 여하튼 자신이 진리에 대해 직접적으로 좋음의 느낌을 얻고 이를 기초로 가치판단을 하는 경우는 진리에 가치를 설정하는 직접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좋음의 느낌을 자신이 직접 얻지는 못한 채 단지 추상적으로 또는 추리를 통해 막연히 진리는 좋은 것이다라고 가치판단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권위자의 가치판단을 자신은 단순히 받아들여서 자신도 그런 가치판단을 하는 경우가 있다. 또는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좋다고 하므로 자신도 이를 무조건 받아들여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마치 어떤 음식의 맛을 직접 보지 않고 단순히 다른 사람의 평가나 그 음식의 가격표만을 보고 그 음식이 다른 음식보다 낫다고 가치평가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런 가치평가를 통하여 가치는 나타나게 된다. 





즉 비록 직접적인 좋음의 느낌을 기초로 하지 않고 또 때로는 자신이 행하는 가치판단의 근거가 불명확하고 정확하지 않더라도, 어떤 이가 진리를 값진 것, 좋은 것 등으로 생각하게 되면, 바로 그 사실 자체로부터 진리는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물이 가치를 갖게 되는 과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어떤 조약돌에 별 근거 없이 애착을 갖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조약돌은 그런 사실을 기초로 다른 조약돌과 달리 가치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가치발생과정은 다른 금이나 보석 등이 가치를 갖게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금이나 보석에 가치가 본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또 금이나 보석의 표면에 여기에는 가치가 있다고 써 있어서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모든 주체가 실제 금이나 보석에서 직접적인 좋음의 느낌을 반드시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가치판단은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고 또 그런 지지를 기초로 가치판단은 큰 비판이나 반성, 점검, 검토 없이 행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가치판단은 타인이나 권위자의 판단을 그대로 수용해서 행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 경로가 어떠하든 어떤 것이 가치를 갖는 것은 어떤 주체가 그것을 다른 것들보다 낫다 좋다 깨끗하다 아름답다 등으로 판단을 행하는 가운데 그 대상이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한편 진리를 좋다라고 하는 데는 다음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다른 좋음을 기초로 그 좋음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됨으로서 가치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이미 선행하는 다른 가치를 전제로 하는 경우이다. 물론 그 선행하는 가치의 출발도 그 근원을 살펴보면 앞에서 살핀 것과 비슷한 경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일단 가치가 이렇게 나타난 후 그 가치는 그와 관련되는 다른 것에도 가치를 발생시키는 관계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밥이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먹을 수 있게 하는 수저나 그릇 등에도 그 밥이 갖는 가치를 기초로 다시 가치가 나타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다른 가치와 관련성을 세우지 않고 무조건 어떤 것이 좋다라고 하는 가치판단을 세우는 경우에도 가치가 원초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경우를 여기서는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상 살핀 것과 같이, 어떤 것의 가치는 어떤 주체가 그것을 좋은 느낌을 곧바로 얻거나, 또는 ‘좋다, 낫다, 깨끗하다, 아름답다...등으로 판단함으로써 나타난다. 그리고 진리가 최초로 가치를 얻게 되는 과정도 이와 같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은 진리가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만으로 당연히 곧바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 데 의미가 있다. 즉, 진리가 갖는 참된 성질 때문에 그런 진리의 본질에 이미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이와는 오히려 정반대로 진리가 갖는 객관적 성질과는 전혀 관계없이 가치가 발생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진리는 주관과 객관 둘이 서로 화합하는 가운데 나타난다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는 진리가 원초적으로 가치를 갖게 되는 경우 외에 이미 발생한 가치를 기초로 다시 이와 관련되어 가치를 갖게 되는 경우들을 나열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끝 http://blog.paran.com/truth007/18449993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3











http://blog.paran.com/truth007/18449989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4 





나. 지적호기심의 충족





진리의 가치가 다른 가치를 기초로 하지 않고 처음 나타나게 되는 경우를 앞에서 보았다. 물론 가치는 어떤 대상 자체만으로 독자적으로 얻어지지는 않는다. 가치는 어떤 대상이 일정한 상황에서 주관과 화합하는 과정을 통해 나타난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화합의 사실이 가치의 ‘최초의’ 출발점이 된다. 이를 앞에서 보았다.  





그러나 이하에서는 진리의 가치가 그 이전에 발생한 다른 가치를 기초로 하여 파생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들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첫 번째가 지적호기심의 충족이라는 측면에서 진리가 가치를 갖는 경우이다. 간단히 말해 어떤 이가 무언가를 알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을 때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욕구가 충족되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진리를 얻고 싶어 하는 희망이 먼저 있었다는 점에서 앞의 경우들과 구별된다. 그리고 지적호기심의 충족과정에서는 앞서의 희망이 갖는 가치를 기초로 파생하는 가치를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이런 지적호기심의 충족은 그 알게된 내용이 반드시 진리일 때만 얻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내용은 비록 잘못되었더라도 그 주체가 그 내용이 자신이 알고자 원했던 내용에 해당한다고 믿으면 지적호기심은 충족되는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알고 싶을 때 누군가 거짓으로 다른 물건이 들어 있다고 알려주더라도 일단 호기심은 해소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질적으로 반드시 진리의 내용만이 이런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기능을 갖는다고 제한하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이는 주관적으로 알고자 원했던 내용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되는 상태가 공통적으로 주는 효과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런 내용이 결국 진리의 내용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리가 갖는 가치라고 이해해도 크게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적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진리의 가치가 반드시 앞에 선행한 희망에만 기초하여 나타나는가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이 과정을 좀 더 분석해보면 다음 결론을 얻는다. 지적호기심의 충족의 경우 앞서의 희망이 갖는 가치를 기초로 좋음이 얻어지는 측면이 일부분 있고 또 한편 그 희망이 충족된 상태가 처음으로 좋음을 주는 측면도 일부분 있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섞여 가치가 얻어진다고 본다. 





지적호기심의 충족에서의 가치가 그 상태에서 처음 나타난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가치에 파생하여 얻어진 것인가를 이론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지적호기심의 충족 과정에는 먼저 ‘진리를 알고 싶어한다’라는 희망이 전제된다. 알고 싶다는 욕구나 희망이 없었는데 그저 새로이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를 호기심의 충족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궁금해 하지도 않는데 누가 알려줘서 알게 되는 경우다. 이런 경우에 나타나는 좋음은 진리에서 처음 가치가 나타나는 앞의 경우에 넣어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호기심의 충족의 경우는 어떤 사실을 알게 되기 전에 먼저 알고 싶다는 희망이 앞서 있다. 이런 호기심이 충족될 때 얻게 되는 좋음은 그 가치가 앞서 있었던 희망이 갖는 가치에 기초하여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아 여기서 구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가치 모두가 선행한 희망에 기초하여 2차적으로 얻어지는가는 문제된다. 





이를 위해 다음 경우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어떤 메뉴판에 적힌 음식그림을 보고 그 음식이 맛있으리라 생각하고 그것을 먹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먹게 되었다. 이 경우 어쨌든 처음의 희망은 성취된다. 따라서 그 사실 만으로 만족이나 기쁨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반드시 만족을 얻게 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막상 그 음식을 먹을 때 맛이 없게 느껴져 불쾌를 느낄 수 있다. 





또 한편 만족을 얻는 경우에도 그 만족이 반드시 앞서 있었던 희망 때문인가에 의문이 있게 된다. 우선 희망이 전혀 없던 상태에서도 그런 상태가 되면 만족이나 좋음을 얻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앞의 예처럼 음식을 먹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어떤 이는 본래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희망이 있었고 그 다음 그 희망이 성취되어 좋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전혀 음식을 먹고 싶다는 희망은 없다. 그러나 음식을 처음 대하고 그저 먹게 됨으로써 맛있다고 느끼고 만족을 얻는 경우도 있다. 이 두 경우를 함께 생각해보면, 어떤 상태가 만족을 주는 것은 반드시 미리 앞서서 그 상태에 상응하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곤란하다. 즉 어떤 희망을 반드시 미리 품지 않았더라도 어떤 상태가 되면 그 상태가 줄 수 있는 만족, 기쁨 또는 불쾌 등을 그 상태로부터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만일 정말 이렇다면, 호기심의 충족의 경우에 얻는 좋음은 진리를 얻게 된 그 상태로부터 직접 얻는 것이지, 앞서 있었던 희망에 기초하여 얻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호기심의 충족의 경우에 얻는 좋음을 앞에서 본 좋음과 특별히 구별하여 살필 의미는 없다. 왜냐 하면 그 때 얻는 만족은 희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 얻는 좋음과 하등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희망이 성취된 상태에서 얻는 좋음은 단순히 희망이 없던 상태에서 어떤 상태가 줄 수 있는 좋음과 조금 차이난다. 





우선 어떤 희망을 갖게 되면 그것이 성취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또 반대로 희망이 성취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불만을 느끼곤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희망이 성취되면 그 상태의 좋음을 적극적으로 의식하게 된다. 그것은 희망이 성취되면 좋겠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냥 걸어 다니는 상태를 생각해보자. 이 상태에서 보통은 그다지 좋음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동안 다리가 아파 걸어 다니지 못했던 어떤 환자가 걸어다니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하자. 그러다가 걸어다니게 된 경우에는 매우 큰 기쁨을 얻게 된다. 평소에는 그다지 좋음을 주지 못하는 상태도 거기에 대해 특별히 희망을 갖거나 좋다는 가치판단을 갖고 대할 수 있다. 이런 때는 그런 평범한 상태에 대해서도 특별히 좋음을 갖게 될 수 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늘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특별히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것이 결여된 상태를 상상해보거나, 실제로 결여된 상태에서, 그것이 갖는 가치를 새삼 의식할 때 좋음을 새로이 느끼게 될 수 있다. 희망이 성취된 상태에서 느끼는 좋음도 이런 측면의 기능을 갖는다. 만일 희망을 갖지 않았으면 어떤 상태가 실현되어도 거기에서 좋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상태를 희망하였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좋음을 찾아내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앞서 가졌던 희망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던 좋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희망을 갖게 되면 희망이 성취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불만이나 초조함 긴장 강박 등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는 희망의 일종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희망이 성취되면 이런 불만이나 갈증이 해소되게 된다. 그래서 막상 희망이 성취된 상태에서는 적어도 과거의 불만이나 갈증을 되풀이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은 희망을 전제로 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상태에서 곧바로 얻는 단순한 만족감과는 구별이 된다. 





결국 희망을 가진 경우와 희망을 갖지 않는 경우 각각에서 어떤 상태가 실현되는 경우는 서로 조금 다른 측면이 발견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희망의 성취로 얻는 만족에서 정확히 얼마만큼씩이 이들 각각에 해당한다고 분별해내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위의 예들을 통해서 조금은 다른 성격의 만족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1) 희망과 가치판단의 관계 





한편 알고 싶다는 희망이 먼저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것이 좋다라는 가치판단이 선행하는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이와 관련하여 희망과 가치판단의 관계를 여기에서 잠깐 살펴보자. 





희망과 가치판단의 관계에서는 희망이 먼저이고 그 뒤에 가치판단이 나타난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볼 것인가가 문제될 수 있다. 경험상 이들 관계를 살펴보면 희망이 먼저 발생하고 그 희망을 바탕으로 가치판단이 행해질 때도 있다. 또는 반대로 일정한 기존의 좋음의 느낌의 경험, 또는 좋음에 대한 가치판단이 먼저 있고 이를 바탕으로 희망이 조합되어 형성되기도 한다. 어느 쪽도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이고, 논리적으로 모순은 없다. 





희망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만일 ---라면 ‘좋을’텐데,,,,, (따라서) ---이 되고 싶다, --을 하고 싶다 ---을 원한다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희망이다. 그런데 이런 형식으로 생각할 때 그 안에 좋음이란 관념이 이미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그 안에서 좋음을 꺼내 표현방식을 ‘---은 좋은 것이다’라고 표현하면 그것은 하나의 가치판단이 된다. 반대로 ‘--은 좋은 것이다’라는 판단구조에서 좋음을 꺼내 앞에 제시한 희망의 구조로 의식하면 희망이 되는 것이다. 결국 희망이나 가치판단 두 형식 가운데 어느 것이나 먼저 이 좋음이란 소재를 사용할 자격이 다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형식이 먼저 사용된 다음에는 다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좋음을 기초로 이를 다른 형식의 형태로 바꿔 표현하는 것도 쉽게 가능해진다. 그래서 이것을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어떤 경우는 희망이 선행하고 그 다음으로 가치판단이 뒤 따르는 것처럼 생각되고, 또 어떤 경우는 가치판단이 선행하고 그 다음으로 희망이 뒤 따르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이처럼 실제 생활에 있어 그 둘은 서로 선후를 번갈아가면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둘은 각기 어느 순서로 진행되어도 어떤 모순이나 문제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치판단이 선행하고 그 다음 그에 상응한 어떤 상태가 실현되는 경우도 희망이 충족되는 경우와 같은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한다. 따라서 가치판단이 선행한 다음 그것에 상응하는 상태가 실제로 성취되었을 때 얻는 만족도 앞에서 본 관계로 살펴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2) 지적 호기심의 내용들 





우리가 알고자 하는 내용은 대단히 많다. 


어떤 대상과 이를 파악하는 주체와 정신 작용이 주어져 있다고 하자. 이 때 정신은 감각내용을 얻고 다시 이를 기초로 개념, 판단, 언어표현들이 나타난다. 물질과 정신에 관련되는 이들 각 요소의 모습, 내용, 성질, 효능[기능, 힘, 작용], 구조, 그 대상의 구성 부분, 그 대상을 포함하는 전체와의 각 관계, 원인요소, 결과요소, 인과관계, 효과[영향] 그리고 또 다른 대상과 여러 기준에서 살펴보는 관계 등등에 대해 인간은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 





또 시간적으로 우리가 단순히 알지 못하는 미래사실을 예견하고, 과거, 현재의 사실을 알기를 원한다. 또 공간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먼 공간 또는 미세한 공간 등에 있는 내용들도 알고자 한다. 





이들을 일정한 유형으로 나눈다면 그것은 곧 현상의 진리를 논하는 체계와 관련이 될 것이다. 이를 잠깐 본다면 일정한 대상의 ① 존재성의 의미, 그리고 ②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 자체, 또 ③ 진리를 파악하는 방법, 논리추론의 방법 ④ 그리고 여러 현상의 모습, 구조, 그것의 변화과정, ⑤ 그것의 가치 ⑥ 목적설정과 그것의 실현과정과 방법 등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알고자 하는 내용은 구체적으로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 또 그 내용에 따라서 실질적인 가치 또한 구체적으로는 달라진다. 





참고로 앞의 ⑤의 가치에 대한 판단 자체는 여기서 다루는 진리에 대한 판단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좋다, 아름답다, 깨끗하다, 선하다’ 등의 가치판단은 ‘이것은 꽃이다’라는 진리판단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가치판단 과정에 진리판단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저 A라는 사람이 B라는 대상에 대해 좋다고 실제로 느끼고 있는가 여부가 B가 갖는 가치의 판단에 선결문제로 요구될 수 있다. 이 때 A라는 사람의 실제 심리상태에 대한 판단은 진리판단이 된다. 또 C는 가치 있는 다른 D의 원인이기 때문에 가치를 갖는다고 평가하는 경우, 정말 C와 D가 인과관계에 있는가, 또 그 관계가 다른 요소들보다 더 밀접한가 등등의 판단은 진리판단의 내용이 된다. 또 가치판단 자체가 어떤 성격의 정신적 판단인가를 따지는 것도 진리판단의 내용이 된다. 이런 점에서 가치에 관련된 판단도 여기의 지적호기심의 대상에 함께 넣기로 한다. 





진리는 이처럼 가지가지 내용들을 알고자 하는 희망에 기초하여 그것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가치를 갖게 된다. 지적호기심이 충족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답답해하고 불편해한다. 진리는 이런 답답함을 풀어주고 지적 쾌감을 준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바로 직접적으로 진리가 줄 수 있는 가치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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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好奇心 curiosity)


요약


인간 및 동물의 생존에 직접 관계되는 동인인 동시에 탐색·인지행동을 일으키는 동인.


설명


인간 및 동물의 생존에 직접 관계되는 동인(動因)인 동시에 탐색·인지행동을 일으키는 동인. 


호기심은 생득적(生得的)인 것으로 


신기성·의외성·복잡성 등 자극적 특징에 접하면 촉발되며, 


무엇이 신기하고 의외이며 복잡하게 느껴지느냐 하는 것은 경험에 따라 다르므로 


실제로는 습득적인 면과도 관계된다. 


또 개체차이가 있으므로 동일한 상황에 대해서도 호기심의 정도는 다르다. 


외적 자극에 대한 지각적 호기심과 


신념·지식·사상 등에 대한 지적 호기심의 2가지로 구별하는 경우도 있고, 


명확한 방향이 없는 광범위한 정보에 대한 확신적 호기심과 


특수한 정보를 추구하는 특수적 호기심의 2가지로 구별하는 경우도 있다. 





호기심은 기존의 인지구조(認知構造)와 새롭게 받아들인 정보사이의 틈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 틈이 작으면 호기심이 생기지 않지만 


너무 크면 기존 인지구조와의 균형이 깨져 불안·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기존 인지구조는 개체에 따라 다르므로 


자극의 변화를 한정하여 개체가 어떻게 호기심을 보이고, 


제한된 상황에서 어떻게 탐색행동을 보이며, 


호기심을 나타내는 감정을 어떻게 평정하는가를 비교하여 측정하는 시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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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





감정 (感情 feeling)


요약


사물에 느껴 일어나는 심정.


설명


사물에 느껴 일어나는 심정(心情). 


심리적 측면


의식의 주관적 측면. 





더 분석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것을 간단감정(簡單感情) 또는 단일감정이라 하고, 이에는 쾌·불쾌가 있다. 


감정일방향설(感情一方向說)은 <쾌-불쾌-쾌-무기(無記)-불쾌>의 한 방향을 주장하고, 


감정이방향설은 <쾌-불쾌, 안정-불안>의 두 방향을, 


감정삼방향설은 <쾌-불쾌, 흥분-침정(沈靜), 긴장-이완>의 세 방향을 각각 주장한다. 


단일감정의 복합을 복합감정이라고 하고, 


그중 사물의 표상(表象)에 따르는 것을 표상감정, 


좀더 복잡한 대상(對象)의 의식에서 일어나며 신체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정서(情緖), 매우 복잡하고 고급적인 정신 활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을 정조(情操)라고 한다. 








감정의 일반적 특성은, 주관성과 


기쁠 때에는 무엇이든지 다 기쁘게 느껴지는 것같이 자기의 전체가 반영되는 전체성, 


일양성(一樣牲;예를 들어 쾌감은 여러 종류이나 불쾌감이 없는 상태이어서 모든 종류의 쾌감이 한 모양이 된다는 설) 등이다. 





단일감정은 감각과 구별하기 어렵다고 하나, 


일반적으로 감정은 직접적인 인식대상이 안된다는 점, 


또 쾌·불쾌와 같이 그 사이에 아무 것도 삽입할 수 없는 대립의 양극(兩極)을 갖는다는 점에서 지적(知的) 요소와 구별된다. 





감정의 본질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주지설(主知說)은 감정을 일종의 표상 또는 표상의 한 성질이라고 보고, 


주의설(主意說)은 일종의 의지 활동이라고 보며, 


주정설(主情說)은 감정의 독립을 인정하는데, 이것을 W. 분트는 주관의 경험에 대한 반응 양식이라고 본다. 





목적론적 해석은 쾌를 생활의 촉진, 불쾌를 그 저지(沮止)로 보고, 


생리적 억설(臆說)은 감정을 말초적 변화로 보는 것과, 뇌간(腦幹) 또는 대뇌피질(大腦皮質)에 있어서의 중추적 변화로 보는 견해가 있다. 





감정의 네 주요 입장





감정에 관한 근대 이론은 다음의 네 주요 입장에서 해명되고 있다. 





내관적(內觀的) 입장


감정을 심적(心的) 요소로 보는 W. 분트에서 시작하여 E.B. 티치너에 이어지며 W. 제임스의 감정감각설(感情感覺說)이 나타나고 다시 감정의미설(感情意味說) 또는 판단설(判斷說)로 발전하였다. 





역학적(力學的) 입장


S. 프로이트에 의해 대표되며, 리비도(libido)·억압(抑壓)·갈등 등의 힘의 개념을 사용하여 정신의학적 재료로부터 이론을 세웠다. 


최근 H.A. 머리에 의하여 이들 역학적 개념은 구성(構成)이고 데이터(data)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 감정을 동기(動機) 발생의 기초로 보는 프로이트의 설에 대해 


감정은 동기로부터 생기고 그 동기의 기초는 본능이라고 하여 


감정을 본능의 의식적 부산물이라 보는 W. 맥두갈의 설이 대립하였으나 


역사는 프로이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행동주의적 입장





의식면을 부정하고 


정서를 본능적 행동의 한 형식으로 보는 


J.B. 윗슨의 유전적 특형(特型) 반응설에서 시작한다. 





최근의 행동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C.L. 헐은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구성개념으로서 감정·정서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하여 체계에서 배제하였다. 


B.F. 스키너도 정서를 어떤 특유한 조작 결과로서 반사군(反射群)이 변화한 상태라 보아 쾌(快)의 개념을 강화(强化)의 개념 체계 속에 해소시켰다. 





생리적 입장


정서를 주로 하는 감정 구성을 하여, 


정서의 위기유용설(危機有用說)을 세운 W.B. 캐넌이 그 대표자이다. 


이 흐름은 정서에 있어서의 자율계(自律系)·시구중추(視丘中樞)의 역할을 밝혀 왔다. 





문학적 측면


문학의 내용을 크게 나누어 사상과 감정이라고 할 때 


감정은 문학의 1차적 내용이다. 





문학에서는 문학의 모든 정적 요소(情的要素)를 감정 또는 정서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I.A. 리처즈는 정서·의지·욕구·쾌·불쾌, 기타 의지적·정감적인 모든 것을 감정이라고 한다. 리처즈는 언어의 의미를 취의(趣意;sense)·감정·톤(tone)·의도(意圖)의 넷으로 나누는데, 감정은 둘째 의미이다. 


그리고 언어는 이 넷이 결합된 종합적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문학에 있어서의 언어의 의미이기도 하다.





가치판단 (價値判斷 value judgement)


요약


보통판단이 사실상의 관계를 표시하는 데 반해 어떤 사실에 대한 주관의 가치의견을 나타내는 것.


설명


보통판단(普通判斷)이 사실상의 관계를 표시하는 데 반해 어떤 사실에 대한 주관의 가치의견을 나타내는 것. 즉 전자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순수한 이론적인 두 개념내용 사이에 논리적 또는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관계이나, 


가치판단에 있어서는 주어개념에 대하여 평가주관(評價主觀)에 의한 시인(是認) 또는 부인의 가치술어(價値述語), 즉 유용(有用)·정(正)·선(善)·미(美) 등을 술어로 갖는다. 





가치판단이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는 가치 자체를 단순히 주관적이며 우연적인 쾌(快)나 불쾌(不快)의 감정에 그치는 것으로 보느냐(자연주의적 입장), 아니면 경험주관을 넘어선 객관적인 본질로서의 가치가 초월적으로 존립한다고 보느냐(현상학적 입장) 


또는 선험적(先驗的) 주관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느냐(칸트주의적 입장)에 따라서 그 견해가 달라진다. 


W. 빈델반트는 이론적 인식판단까지도 진리가치의 관계에 의하여 제약되는 한 선험적인 가치판단을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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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필요] http://blog.paran.com/truth007/18449985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5





다. 가치평가나 목표설정의 기초로서의 진리판단의 가치





사실판단은 ‘저기에 있는 것은 사과다’라는 식으로 사실에 관한 판단을 말한다. 그리고 이런 판단은 그것이 정말 사과인가 아닌가에 따라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사실에 관한 판단 가운데 참인 사실판단은 진리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과는 배보다 좋다’라는 가치판단 또는 ‘내일 사과를 사야겠다’라는 목표설정 내용들은 그것이 참 거짓인가를 판단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이처럼 참 거짓을 판단하기 어려운 가치판단과 목표설정이 현실 생활에서는 의미있는 중요한 행위를 이끌어내고 삶의 내용을 구성해가게 된다. 살아가는 가운데 무엇을 추구하고 행위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가치판단과 목표설정이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치판단과 사실판단 그리고 특히 진리인 판단 사이에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우선 가치판단을 하기 전에 반드시 사실판단을 요구하는 관계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현실에 사실로서 존재하지 않는 관념을 기초로 가치판단을 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과는 좋다’라는 가치판단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전에 ‘저것은 사과이다’ ‘사과는 소화를 잘 하게 도와준다’ 또는 ‘사과는 미인의 얼굴과 같은 어떤 다른 좋음의 느낌을 일으킨다’는 등과 같은 사실 판단들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사과라는 대상에 대해 좋다라고 판단하는 것만으로 가치판단은 충분히 성립한다. 또 예를 들어 도깨비와 같이 처음부터 현실에 사실로서 존재하지 않는 관념을 기초로 ‘도깨비는 나쁘다’ 등과 같이 가치 판단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가치판단은 반드시 어떤 사실판단을 전제로 해야한다고 볼 수는 없다. 더욱이 참인 사실판단 즉 진리판단이 선행해야 한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 일정한 진리판단을 하게 되면, 이를 기초로 일정한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또 가치판단을 행할 수도 있다. 이는 물론 진리판단이 반드시 가치판단을 일으킨다는 강한 관계성이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예를 들어 저기에 꽃이 있다.[진리판단] ‘그래서 참 좋구나!’라고 느끼고 ‘저 꽃은 좋은 꽃이다’ 등으로 가치판단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진리판단은 일정한 가치판단을 불러일으키는 전제 기초가 되어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진리판단이 갖는 하나의 기능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런 기능은 반드시 진리판단만이 갖는 기능은 아니다. 그것은 참거짓여부가 불명확한 사실판단, 명백히 허위인 사실판단들도 가질 수 있는 기능이다. 예를 들어 어두운 곳에서 우리가 병에 담긴 썩은 물을 커피로 잘못 인식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잘못된 판단을 기초로 그 커피는 좋은 것이다. 마시고 싶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한편 단순히 가공해서 만든 허위적인 관념들도 가치판단의 기초가 되고 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능을 갖는다. 예를 들어 기존 관념을 조합해서 ‘금나무’와 같은 관념을 가공해 만든다고 하자. 그리고 이 관념을 기초로 하면 ‘금나무는 좋다거나 나쁘다’는 식으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는 이미 앞에서 보았다. 


따라서 이렇게 가치판단을 불러일으킬 기초가 되어주고,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어준다는 기능은 진리판단만이 특별히 갖는 기능이라거나, 진리판단만이 일으키는 가치라고 보기 힘들게 된다. 





가치판단과정에서 진리판단이 갖는 가치를 이해하려면 가치판단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가치판단을 행하게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대상과 주관이 관계하여 감각내용을 일으킨다. 그리고 다시 이를 기초로 관념, 감정, 판단, 의지 등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판단 가운데서 ‘-이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깨끗하다. 더럽다,,,,’등과 같은 판단을 가치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가치판단은 그런 판단 이전에 어떤 대상에 좋고 나쁨의 감정을 느끼는 과정과 깊이 관련된다. 물론 이런 좋고 나쁨의 느낌과 가치판단은 깊이 관련은 되지만 이를 서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런 좋고 나쁨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정확히 감각내용만을 기초로 해서 얻는가, 아니면 일정한 관념이 얻어진 이후에만 가능한가가 문제될 수 있다. 좋고 나쁨을 느끼는 과정은 자신의 정신과정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작용이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정신과정을 반복해서 반성해 봐도 쉽게 이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보통의 경우 감각내용을 얻으면 곧이어 그에 상응하거나 그로부터 발생되는 관념을 얻는다. 그래서 감각내용만을 얻고 관념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 재현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 직접 빠져 감각내용만을 기초로 좋고 나쁨의 감정을 곧바로 일으켜 가질 수 있는지 여부를 스스로 또는 간접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수면이나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가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상태에서도 손에 침을 꼽으면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처럼 일정한 신체작용이나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각 자극으로부터 감각내용을 얻고 이를 기초로 곧바로 좋고 나쁨의 감정을 갖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런 경우 감각내용을 얻고 나서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지는 않지만 일정한 무의식적인 관념이 발생하고 다시 이를 기초로 반응 처리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작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일체 그런 정신작용 없이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반응이 일어난 것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 이런 반응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난 것인지를 실험하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관념의 개입 없이 감각내용만을 기초로 곧바로 좋고 나쁨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쉽게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여하튼 어떤 관념을 얻게 되면, 그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느낌을 일으키거나 받을 수는 있다. 또 이런 과정은 그 관념에 대응한 현실이 실재하던 실재하지 않던 관계없이 발생함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비교적 쉽게 자신의 정신과정을 반성해보면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만일 포도와 같은 맛을 내는 사과가 있다면 하고 생각해보자. 이 때 그런 사과가 현실에 있든 없든 그런 사과를 생각하면 좋다거나 나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음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좋거나 나쁜 느낌 또는 일정한 가치판단의 대상이나 전제가 되어주는 기능은 허위적이거나 가공적인 관념부터도 가질 수 있다. 즉 그 관념에 대응하는 실제 내용을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경우에도 그 관념을 기초로 좋고 나쁜 느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허위관념 진실된 관념 등의 여러 관념을 기초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참거짓이 불명확한 판단, 거짓이 명백한 판단, 참된 판단[진리판단] 등도 또한 이런 가치판단을 일으키는 소재나 기초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이런 기능은 진리판단만이 특별히 갖는 기능이라고 보기는 힘들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를 특별히 진리판단이 갖는 가치에 넣어 살피지는 않는다. 





그런데 진리인 판단은 위와 같은 가치판단과정에 일정한 형태로 관련되어 그 가치판단을 정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측면이 또 있다. 한편 진리판단은 어떤 내용과 인과관계상 결합된 내용, 또는 부분 및 전체 관계로 결합된 내용들을 함께 제시해줄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결합된 내용들에 대해 각 주체가 갖는 좋음과 나쁨의 내용이 어떤 지도 제시해줄 수 있다. 그리고 이들 판단을 기초로 하면 어떤 대상이 갖는 가치를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또 한편 어떤 목적에 대한 각 수단들은 그 목적과 얼마나 깊은 인과관계를 갖는가도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진리판단은 각 수단이 갖는 가치를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진리판단은 이와 같이 어떤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과정에서 그 가치판단이 좀 더 적절한 형태로 이뤄지게 해준다. 





결국 진리는 이렇게 가치판단 과정에 관련되어 어떤 대상이 갖는 가치를 보다 적절하게 평가하게 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된 판단들이 갖지 못하는 기능이다. 그런데 이 경우 그렇게 적절하게 평가된 가치를 진리가 직접 갖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진리에 기초하지 않던 경우보다 어떤 대상의 가치가 좀 더 적절하게 평가받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적절한 가치평가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좋음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진리는 이렇게 발생된 좋음의 차이를 기초로 다시 파생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관계에 있다. 





이하에서는 이런 측면을 진리가 갖는 가치로서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한편 진리판단은 가치판단과 또 다음 측면에서도 관련된다. 즉, 어떤 가치판단 내용이나 목표가 진리에 토대하여 설정되면 될수록 그 현실적 실현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진리는 어떤 목표를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수단 방법을 찾는데도 도움을 준다. 이는 진리판단이 거짓된 판단과 다른 차이를 일으키는 내용이 된다. 그런데 이는 어떤 것에 대한 가치평가 과정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가치판단 내용이나 목표로 설정된 내용이 실제로 실현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앞의 내용들과는 구별하여 뒤에서 별도로 살피기로 한다. 





1) 가치평가과정에서의 전제








‘사과는 좋다’라는 가치판단이 의미하는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입장이 있다. ‘사과는 좋다’라는 가치판단은 사과에는 좋음이라는 가치의 본질이 있고 이 판단은 이런 사실을 나타낸다는 입장도 있다. [현상주의적입장. 절대주의적 가치객관주의] 또는 가치판단은 자신이나 타인이 사과를 좋아한다는 심리사실을 기초로 하여 이런 사실을 나타낸다는 입장도 있다. [자연주의적입장]





대상에 좋음이라는 ‘본질’이 있을 때 ‘그것이 좋다’라는 표현을 한다는 입장에서는 대상이 그런 좋음의 본질을 갖는가 여부의 진리판단의 결과가 곧 가치판단이라는 입장이 된다. 다만 가치는 주관과 대상이 화합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 입장에는 찬동하지 않는다.  


한편 갑이 ‘사과는 좋다’라고 표현한 것은 ‘갑이 사과로부터 좋은 느낌을 받는다’라는 심리상태를 기초로 이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경우, 사과에 대해 좋음의 느낌이나 관념을 얻고 이를 기초로 곧바로 ‘사과는 좋다’라고 표현하면 된다. 이 경우 좋은 느낌과 관념을 기초로 그 느낌이나 관념을 ‘-은 좋다’라는 가치판단형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 경우 자신이 정말 ‘사과를 좋아하는가’라는 심리사실에 대한 반성 및 진리판단이 반드시 요구된다고 보기는 힘들다. ‘-은 좋다’라는 표현은 ‘자신이 좋음의 느낌이나 관념을 지금 얻고 있다’라는 사실확인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정말 자신이 좋음의 느낌을 받고 있는가에 대해 자신의 심리사실에 대한 반성 성격을 갖는 진리판단을 하게 되면, 그 가치판단이 보다 정확한 것이 될 수는 있다. 





한편 ‘사과는 좋다’라는 표현이 주관적으로 자신이 과거나 현재 미래에 사과를 대할 때 좋은 느낌을 오래 많이 받는가를 판단하여 이를 표현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또는 객관적으로는 다수의 타 주체들이 사과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좋은 느낌을 오래 많이 받는가를 판단하여 내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입장에서 가치판단을 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미래의 심리상태에 대한 예측 판단, 또 타인의 심리사실에 대한 판단이 요구된다. 이런 경우 그런 심리사실들에 대한 판단이 정확하게 되면 그를 기초로 한 가치판단도 정확한 것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예를 들어 사실은 내심으로 좋아하고 있지 않는데 겉 표정만 보고 좋아한다라고 잘못된 판단을 하고 다시 이를 기초로 A는 좋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판단하였다면, 가치판단내용도 부적절한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가치판단의 기초과정에서 진리판단이 정확하면 그 가치판단의 적절성을 높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2) 종합적인 가치판단의 전제





한편 우리가 어떤 대상 A에 대해 가치평가를 할 때는 그 A만 독립적으로 보고 평가를 하기 쉽다. 그러나 인과관계상 A와 원인 결과로 묶여진 내용 B, C 등은 그 A를 실현시키려면 함께 묶어 받아들여야 할 내용이 된다. 즉 B, C 등은 제외하고 A만 따로 취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또 이와 비슷하게 A에 포함된 구성부분들 또는 A가 부분이 되어 구성하는 또 다른 전체, 그리고 A와 다른 것이 서로 함께 결합하여 일으키는 내용 등도 이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하나의 달걀을 얻으려면 어미 닭이 필요하고, 달걀은 나중에 병아리가 될 수 있다거나, 또 달걀 속에는 노른자와 흰자가 있으며, 이들은 어떤 영양소를 갖고 있고 또 달걀껍질은 전체의 생태계에서 잘 썩지 않는 물질이라거나, 또 어떤 질병과 관련이 있다거나 하는 내용, 또 달걀은 산성 물질과는 어떤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는 등과 같은 내용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달걀 하나가 관련되는 종합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어떤 A의 구성부분 b 는 이미 A를 생각할 때 당연히 A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따로 살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A를 전체로 생각할 때와 그 구성부분 b만을 따로 생각할 때는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그 성격도 각기 달라진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구성하고 있는 나사와 같은 부품을 생각해보자. 이 나사가 독립해 있을 때는 언제든지 또 다른 차의 부품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부품들과 결합하여 차를 구성하게 되면 그 나사는 이미 그런 성격을 갖지 못하게 된다. 각 구성요소는 전체로 결합하면 그 전까지 갖던 개별적 성질 가운데 이제는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되는 성질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 부품들이 결합하여 차를 이루게 되면 그 전체로서의 차는 각 부품들 하나하나가 그전까지 갖지 못했던 질적으로 새로운 특성- 예를 들면 이제 달릴 수 있다는 특성 -을 새로 화합해서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전체로서의 차의 성질은 각 부품들의 성격을 단순히 나열하여 합한 내용은 아니다. 또한 전체는 각 구성요소가 갖던 성격들을 그 안에 당연히 포함해 갖는 것도 아니다. 한편 반대로 전체로서 갖는 특성은 각 구성부분에 골고루 포함되어져 분속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가치평가시에도 부분과 전체를 어떤 차원에서 평가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각 부품으로의 가격을 합하면 별것 아니지만, 차 전체로서 결합하면 그 전체는 굉장히 비싼 물건이 될 수도 있다. 또 반대로 전체로서의 차는 고물이어서 이를 쓰레기로 처리해야 하지만 각 부품을 분해하면 훨씬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각기 다른 관계에서 다양한 가치평가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들을 함께 고려해야 적절한 평가가 이뤄진다. 즉, A를 평가할 때 A의 원인인 a 그 결과 b 등을 고려하여 그 a나 b가 각 주체에게 각 기간 각 상황에서 주는 좋고 나쁨을 함께 고려한다면, A에 대한 평가가 보다 적절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은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가치우열을 평가할 때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금과 물을 단순히 그 시장가격만 놓고 비교하면 금이 물보다 높은 가격을 평가받아 가치를 많이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종합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려면 금과 물을 얻기 위해 각기 드는 희생과 이익, 그리고 그 금과 물이 있음으로써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과 이익을 함께 고려하여 평가할 때 보다 정확한 가치판단이 내려질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종합적인 가치판단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먼저 그 A와 인과관계에 있는 것들은 정확히 무엇이며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라는 진리판단이 정확히 이뤄져야만 한다. 그리고 진리판단은 이렇게 어떤 대상의 종합적인 가치평가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3) 수단적 요소에 대한 가치평가의 전제 




앞에서 본 것처럼 어떤 것의 가치는 그것이 관계하는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평가를 달리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유형 가운데 목적과 수단의 관계가 특히 많이 문제된다. 





목적과 수단은 결과와 원인의 관계에 놓인다. 그런데 인과관계에서 어떤 A라는 결과를 낳는 원인은 반드시 단일한 요소로 고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물을 낳는 원인은 얼음도 되고 수증기도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하나의 요소가 낳는 결과도 반드시 하나로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물은 얼음도 될 수 있고 또는 수증기도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목적을 이루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또 반대로 하나의 수단은 다양한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수단들이 갖는 가치는 그것들이 최종목적의 실현에 얼마나 이바지하는가에 따라서 평가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수단방법들 가운데 가치우열은 그것들이 각기 최종목적의 실현에 얼마나 필수적인가, 또는 쉽게 다른 요소들로 대체될 수 있는가 등의 판단을 통해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각 수단들이 갖는 가치는 이런 복합적인 인과관계를 고려할 때 적절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인과관련성을 판단하는 것은 결국 진리판단이 된다. 따라서 올바른 진리판단이 행해질 때 각 수단이 갖는 가치를 올바로 평가할 수 있게 된다고 할 것이다. 








4) 가치 평가의 한계 





가) 인과관계의 판단문제 


  


앞에서 본 것처럼 어떤 의도나 행위의 선악을 평가하려면 그것과 인과관련성이 있는 것들을 함께 묶어 평가해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A가 있으면[有,無,生,滅] B가 있는데[有,無,生,滅] 그 상황에서 A가 없으면[無,有,滅,生] B가 없다[無,有,滅,生]라는 관계가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A가 B의 원인이라고 봐야 한다. 한편 이런 관계로 묶이지 않는 것들끼리는 서로 인과관계가 없는 별개의 현상이라고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돌을 땅에 던진 후, 감기가 걸렸는데, 그 상황에서 설령 돌을 던지지 않았더라도 감기가 걸린다고 생각된다면, 이들은 서로 무관한 현상들로 봐야 한다. 그러나 만일 A와 B사이에 이런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다면, 그 A와 B는 서로 함께 묶어서 이를 살펴야 한다. 왜냐 하면 그 일정한 상황에서 A가 없는 B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둘은 함께 묶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묶여진 내용들을 함께 선악평가에 넣어야 평가가 적절해진다. 





그런데 어떤 의도-행위-결과-영향의 연쇄적인 변화과정에서 인과관계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장 먼저 앞의 규정에 따라 인과관계유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을 엄밀히 동일하게 만들어 반복 실험해서 살펴야만 한다. 그러나 경험세계에서 이런 식으로 엄밀하게 살필 수는 없다. 여기에 이론상 근본적 약점이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유사한 상황을 놓고 이런 요소를 비교 판단하게 된다. 한편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데는 수많은 요소들이 매우 장기간에 걸쳐 개입한다. 즉 B를 낳는데 개입하는 원인요소는 a, b, c, d, e, 등으로 한 두 가지가 아니며 이들은 매우 장기간에 걸쳐 개입할 수 있다. 또 한 요소 A가 영향을 주는 내용도 단일하지 않고 장기간에 걸치며 그 내용도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변화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면 살필수록 이들 관계는 서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이 폭행을 했다고 하면, 그 자의 할아버지나 조상이 가졌던 유전적 질환도 한 요소로 생각할 수 있다. 또 그 폭행의 대상이나 피해자에 대해서도 그렇게 된 데에는 동일하게 수많은 원인요소를 나열할 수 있다. 또 그 행위가 장차 일으킬 사건들도 이처럼 무한히 나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의도를 갖고 행위를 하여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나, 이들 내용을 다 알게 된 후에도 정확히 어느 것들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명확히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결과가 아직 발생하기 전에 어떤 결과가 발생할 지를 예측하여 이런 관계를 판단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게 된다. 따라서 이런 기초적인 인과관계성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선악의 평가를 종합적으로 적절하게 내리는 것도 어렵게 된다. 








나) 심리사실의 판단 곤란





앞에서 어떤 A와 관련이 있는 다른 요소들이 정확히 무엇들인지 실제 파악하기 어려움을 보았다. 그런데 가치판단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런 각 요소가 파악된 다음 자신 및 다른 생명 주체들이 각기 이들에 대해 어떤 좋고 나쁨을 느끼는가이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 사실을 판단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물론 이들 심리사실도 넓게 보면 그 A와 인과관련성을 갖는 사실들이기는 하다. 그러나 심리현상은 그것이 외부에서 명확하게 관찰 가능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꽃을 주면 상대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욕을 듣게 되는 경우처럼 예측한 내용과 실제 일어나는 내용이 다르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도 때로는 종잡을 수 없이 달라지듯 각 주체의 좋고 나쁨의 내용이 변화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자기자신이 미래 어떤 것에 좋고 나쁨을 느끼게 될지 예측하는 것도 손쉬운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타인이나 타생명체가 느끼는 좋고 나쁨을 일일이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을 어떤 여론조사와 같은 방법을 통해 매번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다양한 선택가능한 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선하고 악한가를 판단하고 선택하려면 최종적으로는 인과관계의 예측이 이런 심리사실의 내용까지 포함시켜야만 가능한 것이다. 







다) 인과관계판단이 불가능한 영역 





앞에서는 비록 판단은 어렵지만, 어느 정도 상식적인 범위에서 인과관계가 판단되면 이를 고려하여 선악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서는 의도한 결과가 발생할지, 또 그 결과와 행위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가 끝내 불투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종교적 주장과 같이, 어떤 행위로 인한 결과가 사후(死後)나 경험이 불가능한 다른 초월적 영역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경우에는 가장 중요한 최종 목적에 해당하는 상태가 실제로 존재하는지가 경험영역 밖에 숨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최종 목적과 이에 대한 원인으로서 현실행위와의 인과관계 여부도 참거짓을 검증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종교적 주장과 같은 경우 가치평가의 가장 중점적 내용이 되는 내용들이 모두 참거짓을 확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런 경우 단순히 현실에 나타나는 행위와 현실적 결과만으로는 완전히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종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어떤 종교에서 (나쁜) 사람을 백 명을 해쳐야만 영원히 인류가 모두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거나 천국에 태어나게 된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불교 경전에서는 삿된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 100명의 목숨을 해치려했던 앙굴마의 이야기가 나온다.[불설앙굴마경]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누군가가 주장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경우 현실에 나타나는 살인의 결과만 보면 그것은 명백히 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참 거짓이 증명되지 않는 영역에서 주장된 내용까지 종합해 평가해보면 그것은 아주 큰 선을 이루기 위한 작은 필요악이라고 인정할 수도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살인을 전체적으로 선의 실천과정으로 이해하게 할 요소들이 참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시된다는 점이다. 즉 천국의 삶, 윤회의 고통에서의 해탈과 같은 최종목적상태, 그리고 다시 이와 현실의 살인행위와의 인과관계 등이 모두 명백히 참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그 거짓임을 명백히 밝힐 수단은 갖지 못한다. 이런 경우에 각인은 각자의 믿음에 따라 행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선악의 객관적 가치평가 및 정당성여부 문제는 끝내 미궁(迷宮)에 빠져 버리게 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종교의 영역으로 돌리는 문제는 대부분 이런 성격을 갖고 있다. 이렇게 참거짓이 모두 증명되지 않는 경우, 믿음을 갖는 자는 주로 그 주장들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한편, 그 주장이 거짓임을 단정할 수 없음을 기초로 그것이 참임을 믿으려 하게 된다. 한편 최종목적의 상태가 매우 좋은 요소들로 조합되어 있고 그를 이룰 수 있는 원인은 현실에서 비교적 적은 희생이라고 느껴질 때, 더 나아가 반대로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 받게 된다는 불이익이나 고통은 매우 크다고 생각할 때 그런 믿음을 더 갖기 쉽게 된다. 


반대로 이를 믿지 않는 자는 그 주장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그럴듯하게 느껴지지 않는  한편, 그 주장이 참임을 단정할 수 없음을 기초로 그것이 거짓이라고 믿게 된다. 또 최종목적 상태가 그다지 자신의 희망에 들어맞지 않고 또 그것의 실현을 위한 현실의 희생은 너무 크다고 생각되고, 또 그것을 따르지 않더라도 받게 되는 불이익이 그다지 크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그런 불신을 더 많이 갖게 된다. 이처럼 참거짓을 단정지을 수 없는 상태는 서로 상반되는 두 입장을 모두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물론 현실에서 건전한 종교로 받아들여지는 종교는 현실에서 요구하는 행위나 그로 인한 현실의 결과가 선하거나, 또는 사회에 그다지 해악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실에서 개인적으로 너무 큰 현실적 희생을 요구하거나, 사회적 해악이 크다면, 참 거짓이 증명되지 않는 영역의 내용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런 주장은 적극적으로 그 참이 증명되지 않는 한, 무시되고 배척당하기 쉽게 된다. 그래서 그런 주장을 펴는 종교는 종교로서의 생명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참 거짓을 밝힐 수 없는 영역에 기초하는 최종목적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행위규범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그리고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매우 다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떤 이를 매주 일정한 장소에 나가 일정한 의식을 행하게 하고, 일정한 금품을 일정한 단체에 자발적으로 바치게 하고, 일정한 금기(禁忌)나 명령규범을 따르고 늘 일정한 목적을 향해 일정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등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 다른 행동을 하도록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따라 행위할 때 나중에 받게 되리라 기대하는 이익과 또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 받게 되리라 두려워하는 불이익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 그래서 선택의 갈림길에서 겪게 되는 갈등도 매우 심하게 된다. 또한 그 갈등은 그런 성격을 갖는 서로 다른 주장이 상당히 많이 있기 때문에 더욱 커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가치평가의 곤란성, 현실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선택과정의 갈등 등의 모든 문제는 그 주장의 내용이 경험영역에서 참거짓을 가릴 수 없다는 데에서 출발하며, 이는 끝내 해결되기 곤란한 문제로 남는다. 이때는 결국 무엇을 믿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주장이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와 거짓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에 그 판단내용이 극단적으로 갈리게 된다. 








5) 현실에서의 가치평가와 목표설정





앞에서 본 것처럼 현실에서는 인과관계의 판단이나 진리판단이 모두 완벽하게 이뤄질 수는 없다. 어떤 영역에서는 본질적으로 참거짓의 분별이 불가능하고, 어떤 영역은 인간이 갖는 지적능력의 한계 때문에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다만 이런 한계를 받아들이고 가능한 진리판단의 범위 내에서 여러 가지 선택가능한 경우들에서 어느 쪽이 보다 많은 다수의 생명 주체에게 보다 오랜 기간 동안 보다 많은 좋음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를 판단하여 되도록 선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판단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처럼 어떤 선택이 보다 많은 선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가를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종교적 주장처럼, 참거짓을 끝내 밝힐 수 없는 영역에서는 그 최종목적과의 인과관계가 끝내 뚜렷이 밝혀지지는 않기 때문에 정신적인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가능한한 그 주장되는 내용이 위와 같은 기준에서 얼마나 많은 주체에게 얼마나 많은 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좋음을 주는 것인가를 추리해보고, 다시 그런 가장 최종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여러 수단 가운데에서 어떤 것이 가장 선한 수단인지를 판단하여 선택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백과사전 참조사항] 


수단 (手段 means)


요약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인간이 사용하는 사물이나 방법.


설명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인간이 사용하는 사물이나 방법. 


목적과 상관(相關)되는 개념이다. 


수단이 되는 성질은 어떤 사물에 절대적으로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사물이 사용되는 일정한 목적, 그 사물이 반드시 <수단화>되어야 하는 일정한 목적과 관련하여 그 사물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수단은 주체-수단-목적이라는 3자관계에서 그 위상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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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수정필요] http://blog.paran.com/truth007/18449985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5





http://blog.paran.com/truth007/18449980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6








라. 가치판단이나 목표의 현실적 실현성 





앞에서 가치판단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위적인 관념들을 기초로 해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 이런 가공의 관념을 기초로 해서 목표를 설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금강석으로 지은 집은 현실에 없다. 그러나 이런 집이 좋다고 가치판단하고 이를 집을 짓겠다는 목표를 갖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진리판단에 바탕하여 가치판단과 목표설정을 하게 되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그 내용이 보다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내용이 된다. 또 진리판단은 희망이나 목표가운데에서 현실적으로 실현불가능한 것이 어떤 것이고 실현가능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는 기능도 갖는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진리판단이 차이를 발생시키며 또 이런 점에서 진리판단이 일정한 가치를 갖는다고 이해할 수 있다. 








1) 진리에 기초한 가치평가 


  


어떤 것에 대한 가치 평가, 또는 목표설정과정에서 그 전제로 심리상태나 인과관계 내용 등에 관련해 진리판단이 행해지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그것은 가치판단 과정에서 가치판단이  적절하게 행해지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하는 진리판단이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가치평가의 대상에 대해 진리판단이 독립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그것은 가치평가를 하고 목표설정하게 되는 내용들은 별도로 그 내용이 정말 참인가하는 진리판단의 대상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반드시 진리판단을 거쳐야만 가치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리판단과정을 거쳐 그 판단이 진리에 부합할수록 그것을 토대로 한 가치 평가나 목표설정은 보다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내용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저기에 있는 금이 여기 있는 모래 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가치평가] 또 이런 평가를 기초로 모래보다는 금을 갖겠다고 목표를 세우고[목표설정] 그 금을 구하려는 행위를 한다고 하자. 그런데 가정하여 그 전제인 진리판단 과정에서 노란 돌을 금이라고 판단하고, 또 사금(砂金)을 모래라고 잘못 판단하였다고 하자. 이 경우 가치평가에는 큰 잘못이 없더라도, 기초가 되는 진리판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금을 원하지만 사실은 돌을 향해 나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원래 의도한 가치를 실현하는데 지장이 있게 된다. 따라서 평가나 목표설정이 전체적으로 행위를 잘 이끌어서 원래 의도한 목표를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그 기초로서 ‘저것은 금이다’ ‘이것은 모래다’ 등의 기초적인 진리 판단이 올바로 행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가치평가나 목표설정은 비유하면 마치 지도 위에서 어느 지점이 어느 지점보다 더 좋다는 등으로 판단하고 또 어느 지점을 여행목적지로 결정하는 과정과 같다. 그런데 만일 지도가 방위나 위치를 뒤바꿔 그려 놓은 엉터리라면 그것을 기초로 가치 평가나 목표설정을 아무리 올바로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게 된다. 따라서 가치평가나 목표설정 이전에 그 기초가 되는 지도가 먼저 정확한 지도여야만 한다.  전제가 되는 진리판단이 잘못된다면 마치 신기루를 샘물을 보고 찾아 헤매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이유로 가치평가의 기초로서 엄격한 진리판단이 행해질 필요가 있다.





한편 미래에 대한 목표나 희망의 내용은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 실현가능한지 안한지를 미리 단정 지어 판단하기 어렵다. 단순히 과거의 경험에서 자주 보았던 현상이라고 하여 미래에서도 반드시 또 실현된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또 과거의 경험에서 전혀 보지 못한 현상이라고 하여 미래에서 반드시 실현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희망은 그것이 인과관계상 실현될 수 있는 경우가 있고 실현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의 내용이 예를 들어 물로 금을 만들어보자는 희망이라고 하자. 이런 희망은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희망을 실현시킬 수 없게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경우들을 나열할 수 있다. 우선 어떤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인과관계 내용이 본래 없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우주를 모두 금으로 만들고자 하는 경우와 같다. 또 하나는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인과관계는 있지만, 그것을 어떤 주체가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불을 켜기를 원하지만, 라이터나 성냥으로 불을 킬 수 있다는 내용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경우이다. 또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손으로 바위를 만지면 번개가 갑자기 내려 나무에 불이 붙게 된다는 식으로 엉터리 지식을 갖고 이대로 행하는 경우이다. 또 하나는 인과관계가 있고 그것을 알지만, 그 결과를 얻을 원인요소를 인과관계상 자신의 현실에 마련해 넣을 수 없는 경우이다. 여기에는 원인요소가 자연적으로 마련되게 되어 있는 경우, 어떤 특정상황에서는 그 원인요소가 마련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인과과정은 알지만, 당분간은 개기일식이 일어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경우와 같다. 또 어떤 경우는 일반적으로 원인요소를 어떤 주체의 개입으로 마련할 수 있지만, 어떤 특정상황에서 자신은 그 원인요소를 마련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어떤 주체가 성냥이나 라이터로 불을 켜면 불을 켤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은 무인도에 있어 성냥이나 라이터를 전혀 구할 수 없어 불을 켤 수 없는 경우와 같다. 또 어떤 경우는 자신이 개입하여 원인요소를 언제든지 마련해 넣을 수 있지만 정작 그 특정시점의 상황에서는 그 자신에게 원인요소를 마련할 행위를 할 의사 자체가 형성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성냥이나 라이터로 불을 켤 수 있음을 알고 또 원한다면 켤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정작 그 특정 미래시점에서는 자신이 불을 켜야한다는 의사자체가 형성되지 않는 경우이다. 이런 각 경우에는 미래에 대해 갖는 각 희망은 실현되지 않게 된다. 또 어떤 경우는 특정상황에서는 일반적인 인과관계의 내용과는 달리 또 다른 요소가 개입하여 구체적으로 그 결과가 안 나오도록 인과관계의 구체적인 내용이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보통은 라이터를 켤 의사를 갖고 라이터를 켜면 불이 켜지지만, 어떤 특정상황에서 예를 들어 산소가 전혀 없거나, 습기가 너무 많아서 불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와 같다. 이런 경우에 갖는 희망들은 그 실현성이 없게 된다. 또 자연현상에서도 그런 예외적인 경우 들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인과관계가 있고, 또 그것을 제대로 알고, 그 인과관계의 내용에 따라 그 원인요소를 자연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마련해 넣을 수 있고, 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원인요소를 마련해 넣을 경우에는 그렇게 자신이 개입해 원인요소를 마련해 넣을 의사가 필요한 시점에 일어나 그에 따라 행위할 수 있고, 다시 원인요소를 마련되어 넣어지면, 그 외 별다른 방해요소가 없어서 일반적인 인과관계대로 진행되는 경우에는, 그 일반적인 인과관계의 내용에 일치하는 내용의 희망은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리고 이들 내용과 관계들은 결국 전체적으로 넓은 의미의 인과관계의 내용들에 모두 포함되게 된다. 


여기서 본 경우에서들처럼 진리판단은 그에 기초하여 가치판단과 목표설정을 내리면 내릴수록 그 내용이 보다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내용으로 되게 된다. 이에 반해 허위에 기초하여 가치판단과 목표설정을 하면 할수록 설정한 가치가 허구적인 내용이 되며, 목표는 실현가능성이 없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 진리와 거짓의 내용이 서로 차이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진리의 내용이 가치를 갖게 된다. 





결국 진리는 어떤 가치를 단순히 관념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내용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그에 상응한 내용이 현실 경험세계에서도 실현되게 하는 ‘가치’를 갖는 것이다. 즉 진리는 그에 기초하여 내린 가치판단이나 목표를 ‘현실화하게 하는 측면에서’ 가치를 갖는 것이다. 





한편 이 때의 진리가 갖는 가치는 그 진리 위에서 행한 가치판단이 갖는 가치로부터 파생되어져 얻어진다. 즉, 여기서 진리가 갖는 가치는 어떤 가치의 내용이 ‘현실화’된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희망의 현실화란, 관념으로 구성된 희망의 내용과 상응하는 현실이 나타나게 함을 말한다. 그래서 그 변경된 현실로부터 감각내용을 얻고 그로부터 다시 그 희망과 부합되는 관념을 얻게 되면 희망이 현실적으로 실현된다고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희망을 구성하는 관념을 반복 재생하여 희망의 실현과 유사한 상태를 일으킬 수있다. 즉 머릿속으로만 희망이 실현되었다고 상상하는 경우 등이다. 이 때는 희망이 실현되었을 때 얻을 관념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실제 현실화되는 경우와 달리 현실의 변경으로 초래되는 결과들이 이어서 자연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또 다른 주체가 그 실현을 쉽게 인식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현실화와 차이가 있다. 


가치가 현실화되는 경우도 단순히 가치가 관념 속에서 얻어지는 경우와 이런 차이를 갖게 된다. 가치가 현실화될 때는 그 가치가 갖는 이후의 영향과 결과들이 실제 나타나게 된다. 또 다른 주체들도 그 가치의 대상을 직접 대하여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단순히 가치를 관념속에서 다시 얻는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진리에 가치가 토대를 둘 경우 이런 차이를 낳게 할 수 있는 점에서 진리가 가치를 갖게 된다. 








2) 진리와 허위의 효용성 





앞에서 진리에 기초하여 가치평가를 하고 목표설정을 할 때 그 평가와 목표설정이 보다 실현가능성이 높아짐을 보았다. 그런데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다보면 오직 진리만이 가치평가와 목표설정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고 또 실제 행위를 일으킬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진리에 기초한 경우가 모두 선한 것은 아니다. 진리에 기초한 경우는 단지 목표의 실현가능성만을 높여준다. 따라서 원래의 목표가 선한 경우는 그 선을 실현되게 하고, 목표가 악한 경우는 그 악을 실현되게 한다. 따라서 악한 경우에는 오히려 진리에 기초하지 않아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더 낫다고 해야 한다. 





한편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경우는 그 실현가능성이 떨어져도 현실에서 이를 추구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진리에 기초하지 않더라도 그를 기초로 희망과 의욕을 갖고 가치를 관념적으로 얻어 실현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경우는 모두 의미없고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부정해야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하에서는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경우와 진리에 기초한 경우는 각기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살피기로 한다. 








가) 선악의 기준


  


앞에서 보았듯 단순히 실현가능성만 높아지면 무조건 낫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가는 다음과 같이 선과 악의 기준을 동원하여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우선 진리에 바탕한 경우에는 그를 향한 현실행위가 이뤄지고 원하던 결과도 처음 의도와 가깝게 얻어지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거짓에 바탕을 둔 경우에는 그 원하는 처음 의도는 끝내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러나 그것을 향한 현실행위는 이뤄진다. 그리고 처음 의도와는 다르지만 일정한 결과도 나온다. 또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되지 않는 내용에 바탕을 두는 경우에도 현실행위는 이뤄진다. 또 그로부터 일정한 결과는 나온다. 그리고 이 경우 최종목표는 실현되는 것인지 아닌지가 알 수 없는 상태로 남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나은 상태는 선한 목표가 진리에 바탕하여 그 결과가 실현되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선한 목표가 진리에 바탕하지 않아 그 의도한 결과가 실현되지 않으나, 그것을 추구한 수단과 그로 인한 다른 결과가 선한 경우이다. 


세 번째는 악한 목표가 진리에 바탕하지 않아 그 의도한 결과가 실현되지 않고, 그것을 추구한 수단과 그로 인한 다른 결과가 선한 경우이다. 





좋지 않은 상태는 선한 목표가 진리에 바탕하지 않아 그 의도한 결과가 실현되지 않고, 그것을 추구한 수단과 그로 인한 다른 결과가 악한 경우이다. 


더 안 좋은 상태는 악한 목표가 진리에 바탕하지 않아 그 의도한 결과가 실현되지 않으며, 그것을 추구한 수단과 그로 인한 다른 결과가 악한 경우이다. 


가장 못한 상태는 악한 목표가 진리에 바탕하여 그 결과가 그대로 실현되는 경우이다. 





그 외 수단과 결과가 각기 선악이 엇갈리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경우수는 더 복잡해진다. 한편 각각의 선악의 정도가 얼마나 크고 오래되는가에 따라서도 경우수를 나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들 각각의 처음의도의 내용과 그 추구과정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 그리고 그 이후의 영향력 등을 모두 종합하여 이들이 사회적으로 선(善)과 악을 어느 정도 어느 기간 동안 가져오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내용을 압축하면, 결론적으로 진리에 바탕한 선이 가장 낫고, > 그 다음 허위에 바탕한 현실적 선이 낫고 > 그 다음 허위에 바탕한 현실적 악이 못하고 > 그 다음 진리에 바탕한 악이 가장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보면 가치판단이 진리에 바탕하여 그 내용이 현실화된다고 하여 반드시 선하고 좋은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없다. 진리가 낫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선한 결과를 낳는 경우로 제한된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선한 결과를 낳는 경우로 제한하여, 진리에 기초하여 선을 추구하는 경우와 진리에 기초하지 않고 선을 추구하는 두 경우 사이에서, 어떤 것이 나은지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나)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예들





우리 생활을 반성해보면 우리가 반드시 100% 정확하고 참된 진리판단에 기초하여 가치평가와 목표설정 그리고 추구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많은 가치평가와 목표설정이 참이 증명되지 않은 판단 또는 비현실적거나 허위임이 명백한 판단을 기초로 행해진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첫째 어떤 문제가 본래 참 거짓의 판단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각 주체의 지적 능력에는 일정한 현실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진리보다 진리가 아닌 내용이 좋음을 주는 경우 진리 아닌 내용에 더 이끌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 참거짓판단이 불가능한 경우   





우선 언제나 참 거짓의 판단을 명확하게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영역이 한계가 있는데 경험 가능한 영역을 벗어난 영역에서 어떤 주장이 있게 되면 이에 대해서는 그것이 명백히 참과 거짓 어느쪽에 해당하는지 단정지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만 년 전 이 장소에는 큰 하얀 돌이 있었다고 누가 주장을 한다고 하자. 물론 그 주장자는 그 주장이 참임을 증명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반대 주장자도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할 방법을 찾기가 곤란해진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갖는 주장은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단순히 공허한 주장만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이런 주장은 사실이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지금 현실에서는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당위명제를 이끌어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경우, 그 기초는 참거짓을 밝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게 된다. 


그런 주장의 예를 우리는 종교적 주장들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각 종교에서 주장되는 사후세계나 절대적 신, 천국, 지옥의 존부 또는 윤회와 해탈의 상태 등의 내용들은 그것이 명백히 참이라거나 또는 반대로 거짓이라는 증명을 하기 어려운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각 신앙인에게 어떤 절대적인 행위규범을 만들어내는 기초가 된다. 예를 들어 천국에 태어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든지, 윤회를 끊고 해탈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활을 바르게 하고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한다는 등의 행위규범이 제시된다. 그런데 각 종교를 믿는 신앙인은 이런 명제 및 각 목적상태와 행위규범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관계 등에 대해서 참거짓의 증명을 먼저 얻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의 대부분은 경험영역 안에서 명백히 참거짓을 명백히 단정하기 곤란한 영역에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이들의 참을 굳이 확실하게 증명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전제들을 단순히 믿어 받아들인 상태가 되면 신앙생활은 이를 기초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앙생활은 이렇게 증명되지 않는 명제를 믿고 받아들임을 기초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지적 능력의 현실적 한계 





한편 이외에도 현실적으로는 많은 가치평가나 목표설정이 허약한 진리의 토대위에서 이뤄진다. 그것은 각 개인이 모든 부분에서 100% 올바르고 정확한 진리판단을 얻어내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래의 사실을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대단히 곤란하다. 그래서 미래에 거는 대부분의 희망은 그것이 정말 현실에서 실현되는 진리에 부합한 내용인가에 대해서 보통의 경우 대부분 100% 확신을 얻기 힘들다. 실제로 행하여 보지 않는 한 가능 불가능을 미리 단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하나의 행위가 실제 어떤 결과들을 낳게 되는지 등에 대해서도 미리 100% 참인 내용을 알아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각 주체는 희망을 만들어 내고 또 일정한 계획 아래 행위하며 그것을 추구해 가는데 크게 주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이 진로를 선택할 때 그가 장차 무엇이 될 지 사실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일단은 각기 가장 희망하는 내용을 따라 나아가게 된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가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정확히 진리판단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가치판단이나 목표설정을 하게 된다. 거의 모든 주체들의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만일 일상생활의 모든 경우에서 100% 참인 진리판단을 미리 얻어내고 그 바탕에서만 가치판단을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우리의 현실생활은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진리가 실현성을 높인다는 중요성이 강조된다 하더라도 각 주체가 실제 선택과정에서 어느 정도로 정확한 진리를 얻어낼 수 있는가의 현실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아무리 노력해도 진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사실적인 한계가 있는 경우에 이를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에 바탕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어떤 쪽이 더 나은가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비교가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 현실에서 미래를 정확히 100% 정확하게 예측하고 가능성을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는 실현가능성 여부판단을 상식적인 판단에서 행하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3) 희망에 부합하는 허위




앞에서 살펴 본 기본적인 한계 외에도, 또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진리판단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경우도 있다. 우선 냉정한 현실에 기초하여 생각하면 우리는 많은 한계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진리 여부와 관계없이 판단을 할 때는 실현가능성과 관계없이 좋은 내용만을 모아 묶을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자신의 희망에 더 부합되고 더 좋게 느껴지게 된다. 그 결과 진리 여부를 따지지 않고 단순히 어떤 것이 더 좋게 느껴지는가에 따라 가치판단을 하고 결정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돈을 벌기를 원한다고 하자. 그런데 직접 노력하여 돈을 버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오랜 기간 연마하고 성실히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데 복권이나 도박과 같은 경우는 그 과정은 쉽고 때로는 큰돈을 버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자신이 복권이나 도박으로 돈을 벌 현실적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가는 따지지 않고 큰 돈을 쉽게 벌면 좋겠다는 희망을 세우고 쉽게 그런 길에 이끌려 들어가기 쉽다. 이런 경우는 자신이 바라는 일확천금이라는 희망상태가 이성적인 진리 판단의 내용보다 더 마음상태에 이끌리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다)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경우의 순기능 





앞에서 현실적으로 진리에 기초하지 않고 가치판단과 목표설정을 하고 행위를 해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이처럼 진리에 기초하지 않더라도 많은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우선 진리에 기초하지 않더라도 막연히 관념 속에 떠오르는 상상적인 내용들을 놓고서도 가치판단은 가능하다. 예를 들면 요정과 도깨비 가운데서 요정이 더 낫다라는 식의 판단도 가능한 것이다. 





한편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내용이라도 그에 기초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또 그를 실천할 의지를 갖고 추구행위를 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명백히 잘못된 판단인 경우에도 이런 영향력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발밑에 떨어진 노란색의 물체가 황금이 아닌 경우에 이를 황금이라고 판단하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판단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그것을 주으려는 의지와 행위를 만들어내게 된다. 





한편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경우 그 가치가 현실화되어 차후 예상되는 다른 변화를 일으키거나, 그 내용들이 다른 사람에게도 인식되는 결과를 예상할 수는 없다. 이는 진리에 기초하여 가치가 현실화될 때에야 얻을 수 있는 기능으로서 앞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허위에 기초한 가치는 그것의 현실화를 기대할 수 없어 이런 기능을 예상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가치내용이 진리에 기초하지 않아 실현되지는 않지만 마치 실현된 것처럼 영향을 미치게되는 유사현실화가 되는 경우가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다. 





우선 일저한 가치관념이 언어표현 등의 수단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때 다른 사람들도 그 가치관념과 공통된 내용의 가치관념을 갖게 된다. 그래서 비록 그 가치내용이 현실화되지는 않지만, 마치 그 내용이 현실화되어 종국적으로는 다른 사람도 동일한 가치관념을 갖게 되는 경우와 같은 상태를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황금으로 된 산을 찾아 발견하기를 원한다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런 희망은 진리에 기초하지 않아 그것이 실제 실현되어 황금산에서 황금을 캐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 황금산을 볼 수 있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황금산의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소설로 쓰이거나 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황금산의 희망을 갖게 할 수는 있다. 또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동일하게 황금산을 찾아 떠나게 시도하도록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실제 현실은 없지만, 현실내용과 유사하게 그림을 그리거나, 만화, 연극, 영화로 만들거나 하면 보다 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래서 다수인의 관념세계에서 실제 황금산이 발견된 것과 같은 영향을 미치게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날 산타클로스로 사람들이 분장하여 선물을 주고 받거나, 정의를 위해 싸우는 슈퍼맨을 마음속에 그리거나 하는 행위등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라고 할 것이다. 진리에 기초하여 가치가 현실화된 경우와의 차이는 그에 대응한 엄격한 현실내용이 빠져 있고 또 각 사람이 그 현실내용을 직접 인식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점만 제외하고 나머지 영향력등은 유사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이런 유사현실화는 최종적 가치관념을 거의 동일하게 얻게 한다. 그런데 가치문제에서 중요시하는 내용은 최종적으로 바로 이런 가치관념인 것이다. 즉 현실화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런 가치관념을 얻게 하는 기초라는 점에서 중요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실제 꽃에서 중요한 것은 그 꽃에서 느끼게 되는 좋음의 느낌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꽃이 필수 없는 상황에서 상상이나 그림으로 그린 가짜 꽃이 실제의 꽃이 줄 수 있는 좋음을 동등하게 때로는 그 이상으로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유사현실화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편 생각해보면 허구적인 바탕에서 행한 가치평가나 목표설정이 오히려 진리에 기초한 경우보다 더 추진력을 갖게 하고 행위과정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허구가 좋은 상태를 막연히 조합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현실의 한계에서 설정된 좋은 내용보다 더 강한 좋음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허위의 사실이 오히려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는 진실이라고 할 수 없지만 종국적으로 최종 가치를 가져다주는 많은 거짓된 수단과 방편들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반드시 어느 목적지에 가야만 하지만 절망과 무력감에 싸여 있는 이에게 거짓으로 그 곳이 가깝다고 말하여 심리적인 자신감을 갖게 하여 끝내 그 목적지에 가 닿게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또 의사가 환자가 절망함으로서 더 병을 악화시킬 우려가 있을 때 그 병이 대단치 않다고 말하거나 병명을 속임으로서 치료효과를 끌어내는 경우와도 같다. 


이들은 분명 그 자체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사실과는 거짓된 판단이 된다. 그러나 그 거짓된 판단이 오히려 진실된 판단보다 목적하는 바를 성취시키는 데는 더 유효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 산 너머에는 오직 모래밭 밖에는 없는 것이 진리일 수 있다. 그런데 산 너머에는 멋진 마을이 있고 또 거기에 많은 과일과 음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산을 더 빨리 넘어갈 수 있고 힘든 산행을 이런 희망에 차서 쉽게 해 나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산을 넘어도 사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래 밖에 없다는 진리를 명확히 아는 경우에는 오히려 산을 올라가는 데 지치게 되고 산행을 힘들게 여기게 될 수도 있다.  





한편 이런 시도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장점에 넣기는 곤란하다. 왜냐 하면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결과에는 해로운 결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을 얻기 위해 엉뚱한 재료를 섞어 화학실험을 할 때 우연히 유익한 화학물질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엉뚱한 폭발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다. 따라서 좀 더 공평하게 본다면, 이런 의도하지 않는 결과의 발생은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상은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가치평가와 목표설정이 갖는 긍정적인 면을 살펴본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서 진리와 가치의 문제가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라)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경우의 역기능  





한편 진리에 기초하여 행하지 않은 가치판단과 목표설정은 다음과 같은 단점을 갖는다. 우선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가치와 목표는 허구적인 것이어서 실현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이런 목표를 향해 노력해도 최종적으로 끝내 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일정한 대상에서 기대되는 일정한 기능이나 결과 영향을 얻지 못하게 된다. 또 그 가치의 대상을 다수인이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도 곤란하다. 


또한 이처럼 기대한 내용들이 최종적으로 실현할 수 없음이 밝혀지는 경우에는 그 목표에 걸었던 기대만큼 반대로 환멸감과 실망감을 가져다 주게 된다. 따라서 목표상태가 실현불능함이 명백해질 때에는 실망과 환멸을 갖게 되어 앞에서 본 긍정적인 면이 상쇄(相殺)되어 없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반드시 진리에 바탕하지 않아도 된다면, 좋음을 주는 것들을 무조건 함께 덧붙인 상태를 관념으로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새처럼 하늘도 자유롭게 날 수 있고 물고기처럼 바다 속도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는 그런 인간을 생각해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진리에 바탕하지 않은 내용이 현실보다는 더 낫다는 평가를 받기 쉽다. 또 이런 결과 진리에 바탕하지 않은 내용이 목표로 선택되기 쉽다. 그 결과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여 가능했던 최선의 상태보다 못한 결과를 얻게 만들기 쉽다. 이런 점들이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경우의 단점이라고 할 것이다. 





마) 진리가 오히려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경우 





앞에서는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경우의 장단점을 보았다. 진리에 기초한 경우에는 그 내용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진리에 기초한 경우 오히려 단점을 갖는 다음과 같은 경우도 예상해볼 수 있다. 





생각해본다면, 진리의 내용이 항상 선한 결과를 가져다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진리가 오히려 악한 희망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거나 선에 이바지하는 바가 없는 경우는 비록 진리가 어떤 뜻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더라도 특별히 가치를 갖는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앞에서 보았다. 





또 어떤 이가 자신의 선한 뜻이 실현불가능함을 알고 더 이상 선한 뜻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에서는 반드시 진리를 아는 것이 가치를 갖는다고 보기 힘들다. 비록 그것이 실현불가능하더라도, 선한 뜻을 향해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실현가능한 악 가운데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 실현하는 것보다는 더 낫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진리는 언제나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진리는 어느 때는 선한 효용을 발휘하고 또 반대로 어느 때는 오히려 유독한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진리가 진리라는 사실만으로 무조건 가치를 갖는다는 판단과는 다른 입장이 된다. 








바) 가치의 우열





(1) 실현과 과정의 가치 





앞에서 논의대상을 그 목표가 선한 경우로 제한하였다. 그것은 아무리 진리에 바탕을 한다고 하여도 악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를 허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선한 뜻에 제한을 둔 상태에서 그것이 진리에 바탕을 둔 경우와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은 경우를 비교하여 보자.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경우의 단점만을 본다면 비록 그것이 선한 목표라고 해도 현실에서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내용들은 추구할 목표로 선택되어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보았듯 현실적으로 100% 진리에 기초해서 가치를 판단하고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뿐만 아니라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은 가치평가나 목표설정이 나름대로 긍정적인 가치를 갖기도 한다. 우선 이들도 무언가를 추구하는 행위를 이끌어낸다. 또 그 추구과정에서 즐거움이나 기대 희망 의욕을 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갖는다. 문제는 단지 최종적으로 의도하는 내용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 끝내 참이나 거짓 어느 쪽으로도 결론이 나오지 않는 경우에서는 문제 성격이 좀 달라진다. 왜냐 하면 이런 경우는 추구하던 목표가 절대 실현불능임이 명백히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 성취의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명백히 실현불능이라는 것도 밝혀지지 않는다. 따라서 계속해서 신념을 갖고 끝까지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계속 추구하는 자세를 잃지 않으면, 끝내 환멸을 얻거나 실망을 얻지 않은 채 그 과정을 계속해 나갈 수도 있다. 즉 삶을 마칠 때까지 그것을 믿고 그 목표를 향해 즐거이 추구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그 결과물을 얻지 못하고 끝내 삶을 마치더라도 그 과정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각 종교인이 부처가 된다는 꿈을 추구하거나, 신의 선택을 받아 천국에서 행복하고 영원히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것은 최소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를 현재의 삶에서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추구하는 이가 그런 이루기 힘들 것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매우 즐겁고 희망과 의욕에 부풀어 있으며,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현실적으로 선한 결과를 낳는 경우에는 반드시 최종적인 결과물이 현실에서 얻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모두 가치없다고 비판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단순히 그 결과물이 있고 없고로서 가치의 우열을 내리기 힘들게 된다. 이 말은 명백히 진리임이 입증되어야만 목표로 설정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 된다. 





진리에 바탕하고 않고 여부에는 이런 장단점이 섞여 있기 때문에, 명확히 어느 것이 현실에서 나은가의 문제는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기 어렵게 된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선한 뜻의 객관적 실현을 중시한다면, 당연히 진리에 바탕을 둔 가치평가와 목표설정이 중요한 것이라고 하기 쉽다. 또 반대로 선한 뜻을 희망을 갖고 의욕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을 그 자체로서 중시하다면 반대의 결론도 얻어 내기 쉽다. 주의할 점은 이들이 모두 선한 범위에서만 논의된다는 점이다. 








(2) 장점의 결합  





위에서는 진리에 바탕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어느 경우가 더 나은 것인가를 살펴 보았다. 그런데 가능하면 의도, 과정, 결과, 영향면이 모두 선(善)할 뿐만 아니라 또 각 경우가 갖는 기능적 장점만을 함께 모아 놓을 수 있다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진리에 바탕한 가운데 선(善)한 가치평가와 목표설정을 하는 경우에도 다시 허구적인 내용에 바탕을 둔 가치평가나 목표가 갖는 긍정적 기능을 이에 함께 갖추게 하는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또 반대로 진리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바탕에서 희망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수단 등에서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강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즉 각 경우가 갖는 장점을 추려서 이를 적절히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즉 진리에 기초를 두고 목표를 설정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용해볼 수 있다. 





우선 진리에 기초한 내용은 허구에 기초한 내용보다 좋음을 갖는 측면에서 제한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의 한계에 갇혀서 어떤 가치평가나 의사결정을 하면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런데 허구는 반대로 나쁨도 또한 수없이 다양한 형태로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이 때 만일 이런 허구적인 나쁨과 비교하면 현실에서 추구하는 과정이나 목표도 매우 좋은 것이라고 인식을 바꿔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우선 허구적인 나쁜 상태들과 현실적인 목표를 비교하여 목표나 추구과정 모두에서 즐거움을 얻어내는 노력을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현실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허구적인 좋음의 상태를 실현하는 수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렇게 되면 현실적인 목표에 허구적인 즐거움을 덧붙이는 효과가 있다고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지식이나 기능을 익히기 위해 힘든 훈련을 받는 경우에 그런 고통도 지옥의 고통에 만일 비교한다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그런 훈련이 장차 천국에 나아갈 수 있는 선행을 펼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한편 현명한 어떤 사람이 자신이나 사회가 가야할 방향을 이성적으로 진리에 바탕하여 선하게 정하지만, 그것을 실천해야 할 자신이나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는 일종의 방편으로, 허구적인 내용과 혼합하여 제시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 허용될 수 있는가를 검토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이 공부나 규범을 지키는 것을 싫어할 때, 그것을 열심히 지키고 노력하면 나중에 천국에서 아주 좋은 선물을 받게 된다는 식으로 어른이 가르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이 경우, 그런 허구성은 나중에 제시한 내용이 결과적으로 허구임이 밝혀지면 신뢰를 잃게 하고 보다 큰 환멸을 가져다 줄 수도 있게 된다는 점은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방안은 이런 단점보다도 얻는 장점이 많아야 하고, 더 나아가 상대나 사회전반을 선으로 이끄는데, 다른 더 좋은 대안이 없는 경우에 한정해서 허용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현실적 한계 때문에 진리에 바탕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치평가와 목표설정을 하는 경우에는,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 추구과정은 진리에 바탕하여 선한 결과가 얻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끝 http://blog.paran.com/truth007/18449980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6





http://blog.paran.com/truth007/18449970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7








마. 목표의 실현과정에서 진리가 갖는 가치 





앞에서 진리에 기초하여 가치판단을 하고 목표를 설정하면 할수록 그 목표는 현실성이 높아짐을 보았다. 그런데 이 내용을 설정된 목표의 실현과정의 측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어떤 목표가 설정된 경우, 이를 실현시킬 방법과 과정에 대한 인과관계적 진리를 많이 아는 경우, 그 희망을 실현시킬 가능성이 많아지게 된다. 또 진리를 많이 알수록 같은 뜻을 보다 더 쉽고 빠르게 적은 노력으로 실현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진리는 가치나 목표를 쉽게 현실화할 수 있게 하는 측면에서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어떤 목표를 설정하는가에 따라 필요한 인과관계적 지식의 내용이 달라진다. 건강, 물질적 부 등과 같이 그 목표상태를 무엇으로 정하는가에 따라 그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원인요소에 대한 진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망이 무한한 만큼 필요로 하는 지식도 무한히 다양하게 된다. 한편 어떤 경우는 진리가 희망을 실현시킬 원인요소를 알려주는 간접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어떤 뜻의 실현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지식을 전수하는 교사, 강사, 교사 등의 교육직에 있는 경우라든지, 어떤 퀴즈대회에서 지식을 겨뤄 상금을 타는 경우 또는 지식의 보유를 통해 타인으로부터 어떤 인정을 받고자 하는 등에서는 지식의 보유자체가 그 당면 목표를 직접 실현하는 수단이 되어준다. 





한편 일반적으로 진리를 많이 알수록 설정한 목표를 현실화할 가능성이 많아지게 된다. 그리고 진리를 많이 알면 알수록 목표설정과정에서도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희망의 선택의 폭이 그만큼 많아지게 된다. 설정된 목표의 실현가능성을 여기서 살피고, 목표설정 과정에서의 실현가능성이 높아지는 측면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런데 진리를 무한히 알게 되면 그 가능성도 무한히 넓어진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진리를 아는 정도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게 될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진리를 아는 정도 





진리의 내용을 아는 정도를 나눠본다면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경우와 또 반대로 진리의 전체를 정확히 100% 다 아는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양극단에 해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논의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현실에서는 이 양극단 사이에서 아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이 뒤섞인 중간 상태에서 각 부분에서 어느 정도의 우열이 있는 정도를 생각해 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진리가 갖는 가치를 점검하기 위해 이런 양극단의 경우도 넣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가)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경우   


가장 먼저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자신의 생명유지나 생식활동이 가능할 정도로 기본적인 좋고 나쁨의 판단이 있고 그런 판단에 기초하여 반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반응이 가능한 전제로서 가장 기본적인 감각-개념판단-비교 분별 종합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기초적인 자극-반응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기능은 아주 미약하지만 진리판단의 범위 안에 넣어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아무런 진리판단이 행해지지 않는 경우는 생명체 유지활동 자체가 불가능한 무생물체 또는 수면상태의 생명체 정도를 생각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무생물체를 생각해보면 이들은 모든 외계의 변화 자극에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반응만을 보인다. 즉 무생물체는 자기와 대상이 어떤 것들인가에 대한 판단이 없고, 그것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판단하지도 않고 따라서 무엇을 특별히 추구하거나 피하는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상태가 극단적으로 아무런 진리판단이 행해지지 않는 상태라고 할 것이다. 





나) 진리를 약간 아는 경우  





그러나 이제 극단적인 상태를 벗어나, 미미한 진리판단이 행해지는 경우는 미생물, 식물, 동물 등이 행하는 생명반응 과정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도 갓난아기의 상태라거나, 정신지체의 상태는 이와 유사한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지적능력의 정도는 천차만별이어서, 이를 일일이 단계를 나눠 살피는 것은 번잡하다. 





그러나 일단 이들이 생명체인 이상 모두 무엇이 자신에게 좋고 나쁜가를 판단하여 좋은 것을 가까이 하려고 하며 싫은 것을 멀리 하려는 반응체계는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다. 단지 진리를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각 생명체별로 나름대로 좋은 것을 추구하지만, 그 실현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설정된 목표와 실현되는 모습 사이에서 차이가 많이 나게 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1차적으로는 목표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검토가 불충분해서 일 수 있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설정된 목표를 이룰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이를 이용하여 실현해내는 능력이 떨어져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원인이 각 생명체가 희망을 실현해내는데 지장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진리를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지면 좋고 나쁨을 좀 더 종합적으로 적절하게 판단하기 힘들다. 선택 가능한 여러 갈래에서 각각 인과관계선상 초래하게 되는 결과들을 파악하여 무엇이 보다 장기간에 걸쳐 많은 좋음을 주는가를 판단하고, 더 나아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주체의 좋음까지 함께 고려해 판단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이들을 함께 판단할 높은 정도의 진리판단이 요구된다. 





다) 진리의 효용의 한계 




우리가 진리에 기대하는 내용은 목표설정, 실현과정에 모두 있다. 그래서 진리를 많이 정확하게 파악하면 할수록 어떤 선택이 인과관계상 더 많은 주체에게 오랜 기간 좋음을 주는가를 판단할 수 있고 따라서 좀 더 가치가 많은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또 진리를 많이 정확하게 파악하면 할수록 설정된 목표를 보다 잘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하게 된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은 지식의 이런 기능을 나타낸다. 





그런데 진리를 정확히 알면 알수록 이런 기능을 무한히 잘 발휘할 수 있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지식이 이런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이용의 형태가 다음과 같아야 한다. 먼저 어떤 지식은 어떤 희망을 실현시킬 원인요소가 무엇인가를 알려줘야 한다. 그 다음 이런 지식을 이용할 의사를 자유롭게 언제든지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이를 이용할 의사를 갖게 되면, 이제 그 원인요소를 언제나 자유로이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기존의 현상 변화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원인요소를 현상의 변화 속에 끼어 넣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다음 그렇게 끼어 넣은 원인요소로부터 결과는 정확하게 인과관계의 내용대로 구속되어 실현되어져야 한다. 조건이 이와 같아야만 지식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불을 켜는 지식을 통해 불을 자유롭게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을 생각해보자. 먼저 어떤 이가 불을 켜는 데 필요한 원인요소가 예를 들어 성냥을 긋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이를 모르면 불을 원해도 불을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이 지식을 이용하려면 가장 먼저 자신이 불을 일으킬 의사를 자유롭게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인과관계상 자신의 마음 안에 불을 일으킬 의사가 당분간 나오지 않도록 구속되어 있다거나, 또는 전혀 일어나지 않도록 되어 있다면 그 지식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다음 그런 의사가 있으면 자신이 성냥을 구하기 힘든 동굴이던 들판이던 어떤 상황에서든 불의 원인요소인 성냥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상황이던지 성냥을 그어 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성냥을 구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다면, 불을 켜는 것도 함께 제약되게 된다. 즉 그 지식의 힘을 발휘하는데 제약을 받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냥을 그으면 자신이 예상한대로 정확히 불이란 결과를 얻어야만 한다. 만일 이 때 비가 내리는 등과 같이 다른 요소가 개입하여 예상과 달리 불이 얻어지지 않곤 한다면 그 만큼 지식의 효용은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상태를 자세히 살피면, 위에서 요구한 조건들이 사실상 모두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장 먼저 우리는 모든 분야에 걸쳐 지식을 완전히 갖지 못한다. 그 다음 우리의 의사(意思)의 내용은 정작 우리 자신 안에서 나타나고 사라지지만, 이를 어떻게 자유롭게 일으키고 머무르다가 사라지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정신적 의사는 외계의 사물과 우리의 정신이 함께 화합하여 만들어내는 내용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사물과 정신이 화합하여 감각을 낳고, 감각을 기초로 개념이 만들어지고, 개념은 연쇄적으로 또 다른 개념을 불러 일으키거나, 말, 행위 등을 일으키고, 나아가 비교 분별 판단 등이 이뤄진다. 





그런데 이런 화합과정으로서 의사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과정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가 우선 문제된다. 





만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의사를 조정할 어떤 수단도 찾기 힘들게 된다. 그런데 한편 의사의 변화가 인과관계의 구속을 받아 일어난다고 생각해도 일정한 어려움은 있다. 이는 다른 현상의 인과관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것은 일면 인과관계에 따라 이용할 수단을 주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인과관계는 한편으론 인과관계에 벗어난 내용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중성을 갖는다. 그래서 만일 어떤 의사가 인과관계에 의해 나타날 내용이라면 나타나겠지만, 그러나 인과관계에 의해 나타나지 못할 내용이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도 의미한다. 또 인과관계를 이용하여 다음 의사를 일정하게 나타나게 하려 할 때 그런 의사도 다시 인과관계의 지배를 받는다는 무한소급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인과관계가 한편으론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단을 주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원인도 인과관계에 의해 주어져야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문제점이 있게 된다. 결국 어느 경우에 해당하던 우리가 예상하는 자유자재함을 갖지 못한다. 





정신이 생각하듯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우리의 현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다음 순간의 정신에 어떤 내용이든 마음대로 넣을 수 있는가? 일단 우리의 정신이 자유로와서 원하는 내용은 언제든지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좋은 내용으로 채워 넣으려할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가 마음에 만족, 기쁨, 즐거움, 보람, 가치감, 평온감, 안정, 의욕, 희망 등으로 가득차기를 원한다고 하자. 또 모든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진리의 내용을 곧바로 얻기를 원한다고 하자. 그러나 현실에서는 비록 자신이 이렇게 원해도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밝은 내용, 그리고 진리의 내용이 자유롭게 선택가능한 데 불쾌한 내용, 또는 오류의 내용을 굳이 선택해 불쾌하게 되고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치 않아도 불쾌하고, 화나고, 슬프고..... 두렵고,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또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 우리 마음에 서로 모순되는 두 마음이 있을 때 한 쪽 방향을 선택하여 계속해서 그 상태로 유지하고 싶어도 반대 방향의 유혹에 휩쓸리는 과정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전혀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념은 사실상 다음의 과정을 거쳐서 얻어지게 된다. 즉, 어떤 대상과 정신이 서로 화합하여 감각내용을 얻게 되고 이를 기초로 관념을 낳고 다시 이를 기초로 다른 관념들을 연상하고 또 이들을 비교 분별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관념이 떠오르게 할 자극을 줄 수 있는 환경에 자신이 위치하게 하여 그 관념을 얻도록 미리 장치할 수도 있다. 또는 녹음이나 메모를 남겨두고 일정순간에 이를 대하는 등의 수단을 쓸 수도 있다. 또 일정한 관념을 일으킬 내용을 일정 순간에 타인이 자신에게 말하게 하거나 글자를 쓰거나 몸짓 태도 등으로 표시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예를 들어 필요한 시점에 그 A를 마음에 넣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또 있다. 앞에서는 그런 식으로라도 A를 원하는 시점에 마음 안에 자리잡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A를 일정시점에 ‘갖기를 원한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먼저 문제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내용도 마음의 한 내용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최초에 그런 마음 자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또 하나의 과제로 소급되게 된다. 그것은 A를 가지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상황 예를 들어 그 A가 마음에 있으면 좋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상황을 마련하는 것이 다시 필요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인과관계선상에서 어떤 마음을 갖게 되고 그것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과정이 인과관계의 연쇄적인 관계선상에서 허용되는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우리의 삶에서 의미 있는 행위는 대부분 의사의 지배를 받는다. 물론 우리 신체 모든 변화 작용이 우리의 의사의 명령을 받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호흡 소화 작용이나 수면, 성장, 기타 육체에 일어나는 많은 물리적 화학적 생리작용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특징짓는 중요 행위들은 분명 의사의 지배를 받고 일어난다. 많은 의식적 활동과, 취업, 결혼 등과 같은 일의 결정과정과 같다. 따라서 정신적 의사는 우리의 삶의 내용을 이끄는 주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의 마음도 뒤의 마음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육체도 마찬가지다. 의사의 내용 그리고 그 생성, 유지, 사라짐의 과정에 대해서 확실한 통제권을 갖는 주체 요소를 자신의 정신 또는 육체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이 전혀 관계없다고 배제할 수도 없다. 마음의 내용이 화합해 나타나는 데는 외부의 물질, 정신과 함께 이들도 역시 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기존 생각이나 자신의 육체적 상태, 또 외부의 사물이나 타인의 말 행동 등이 다음의 마음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이다. 결국 마음의 내용은 이들 요소가 서로 화합해 만들어 낸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하나가 전적으로 그리고 자유로이 결정하고 조정하는 힘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외계의 물질, 정신,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서로 관계하고 화합하여 일단 자신의 정신 안에 마음의 내용이 나타나면, 그것은 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주체적 지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의사가 자신의 정신에 나타나 머무르기 때문에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일단 나타난 의사만을 출발점으로 생각하면 자신은 자신의 의사 즉 자신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최고의 핵심이 되는 의사의 내용이 여러 요소의 화합에 의해 이뤄지고 그 과정이 인과관계에 묶여 있다고 이해하면 삶을 조종하고 출발점이 되는 의사가 과연 본래 무엇의 지배를 받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밥을 먹고 쉬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의해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 생각이 무엇에 의해 만들어져 자신에게 주어졌는가가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이다. 





여기까지 우리의 의사를 어떻게 자유롭게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위 설명을 기초로 생각해보면, 예를 들어 불을 켜는 지식을 알더라도 불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사 자체를 자유로 통제할 수 없어서 원하는 결과를 언제나 자유롭게 만들어내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그 지식은 불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사가 여러 복합적인 인과과정을 거쳐 자신의 의식 안에 나타날 때에만 간신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의사의 변화가 외부현상의 변화보다는 손쉽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마음대로 조정하여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유롭게 불을 일으킨다고 믿는 것은 우리의 의사가 그러한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나타날 때 그런 지식을 이용하면 뜻을 실천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한편 의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부현상의 변화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다. 우선 희망을 실현시킬 원인요소를 알아도 그 원인요소를 일정한 상황에 만들어 내는 것은 여전히 인과관계의 구속을 받는다. 즉,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나타나는 것만이 인과관계의 구속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 그 원인요소를 마련해 끼워 넣는 것 자체도 인과관계의 구속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 인과관계는 그 안에 인간의 이용행위가 포함될 수 있는 내용이어야만 한다. 천체의 변화와 같은 인과관계는 단지 관찰만 가능할 뿐 인간의 이용행위가 그 안에 포함되어질 가능성이 적으므로 이용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인요소가 무언가를 알아도 어느 상황에서나 자유로이 그 원인요소를 끼워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를 들어 성냥을 그어 불을 일으키는 지식을 알아도 성냥이 없는 상황에서는 성냥을 그어 넣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 외에 원인요소와 결과의 발생에도 세세하게 보면 갖춰야할 다른 원인요소가 더 많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를 들어 성냥을 그어 불을 켤 때도 적당한 습도나 산소 등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앞에서 살핀 것과 같은 한계 때문에 진리를 파악하는 정도가 높아져도 무한정 자유롭게 뜻을 세우고 실현시킬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라) 진리를 완전히 아는 경우  





그런데 가정하여 100% 정확하게 진리를 안다면 과연 어떻게 상황이 바뀔 것인가를 한번 상상해보자. 물론 무한한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의 모든 현상에 걸쳐 진리를 100% 정확하게 아는 상태를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하여 논의하는 것은 진리가 갖는 가치를 정확히 평가 음미해보려는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인과관계적 구속을 의사와 외부 현상의 변화에 모두 적용하면, 비록 인과관계의 내용을 100% 정확하게 알아도 자유롭게 그 뜻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인과관계의 구속을 받는 현상의 변화의 내용을 더 정확하게 많이 안다는 것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진리를 많이 알수록 그전까지는 불가능했던 많은 일을 새로이 할 수 있게 됨을 안다. 예를 들어 석유 화학지식을 통해 비닐을 만들고 차를 타고 먼 거리를 자유롭게 다니는 등의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한계 속에서도 진리를 많이 파악하면 할수록 어떤 뜻을 실현시킬 방안을 많이 알게 된다고 할 수는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실현가능한 범위의 뜻이 많아지고 선택 가능성도 그 만큼 넓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진리가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우리는 사실상 숨겨진 진리의 내용을 아직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직 알지 못한 진리를 새롭게 알게 되면 어떻게 변화할지 역시도 미리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이런 가정을 무한히 확장하여 만일 숨겨진 진리의 내용을 무한히 100% 다 알게 될 때는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지도 역시 상상하기 곤란하다. 만일 진리의 모든 내용을 다 알아서 전지(全知)하게 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전능(全能)하게 될 것인가? 그래서 예를 들어 어떤 재료를 가지고서도 어떤 다른 물질 예를 들어 금 같은 것을 무한히 자유로이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인가? 과거로도 갈 수 있고, 겨자씨 같이 작은 공간에 우주를 담을 수도 있을 것인가?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에 앞서 전지전능(全知全能)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즉 이 문제를 살피려면 먼저 얼마나 어느 정도로 알아야 전지라고 할 것인가를 명확히 개념지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변경시킬 수 있는 지식을 요구하여 전지(全知)라고 한다면, 전지와 전능은 함께 쉽게 일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개념상 전지와 전능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개념에 일치하는 상태가 실재하는가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한편 단순히 전지의 개념을 시간 공간적으로 무한한 대상의 본질과 그 각 관계성을 다 안다는 정도로 전지(全知)의 개념정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런 정도의 앎이 이뤄지면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변경시킬 수 있는가? 





상상해보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가능한 것은 여전히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입장도 가능하다. 실제 그런 상태를 경험하거나 관찰해서 알 도리도 없고 단순히 형식논리적으로 이 문제를 추리나 연역(演繹)만을 통해 해결할 수도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관념을 마음대로 조합하여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종이를 불에 태우면서 그 결과로 이 세상에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나열해 나오기를 바랄 수도 있다. 이처럼 희망은 무한히 관념이 결합되는 대로 확장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외계 현상의 변화과정에는 이보다 구속이 많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진리로써 가능한 일은 이 보다 제한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형식 논리적으로 자체적으로 답이 얻어지지 않는 문제를 만들고 이 답을 얻어내라고 요구하거나, 형식 논리적으로 모순이나 오류가 되는 명제를 만들어 놓고 이것을 참으로 만들라는 요구도 해결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5보다 작은 정수에서 7보다 큰 정수를 빼서 양수가 나오게 하라는 요구와 같다. 또 영원불변 고정된 ‘변화’를 만들어내라는 식으로 문제 자체에 모순이 들어 있는 경우도 같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가능한 상태를 실현시키는 것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진리와 희망의 실천하는 힘과의 관계는 오히려 다음과 같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내용은 나무는 나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무를 금으로 산은 들판으로 물은 우유로 만들고 싶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우리의 희망과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일 뿐이며 따라서 우리의 희망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진리의 차원은 현상들이 어떤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 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달리 물을 황금이나 우유 등으로 자유자재로 바꿔주는 힘을 진리가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진리를 파악하면 할수록 그 보다 못한 상태보다는 더 가능성이 많은 상태로 나아갈 것이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한편 진리를 완전히 안다고 할 때 선택은 어떤 유형으로 하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도 가질 수 있다. 사실상 진리로 파악할 대상에는 자신의 선택과정에 대한 내용도 포함된다. 그래서 자신이 미래에 선택하는 내용을 미리 100% 정확히 알게 된다면 그런 존재는 자신의 선택의 순간에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또 100%의 전지(全知)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선택행위, 또는 자신의 미래의 모습 등만은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가정할 때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의문도 같은 성격을 갖는다. 





사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만일 정말 자신의 미래에 대한 지식이 100% 정확하다면 그 자신은 그와 다른 내용을 원해도 실현시킬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왜냐 하면 자신의 관찰한 100% 정확한 미래의 내용과 다른 모습을 실현시키려는 희망이 실현된다고 가정하면, 이상한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즉 처음 A라는 미래의 모습을 파악하고 이제 그 모습을 B로 바꿀 수 있다고 하면, 우리가 처음 파악했던 A라는 모습은 B라는 모습을 A로 잘못 파악했던 오류의 내용이라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100% 정확한 모습이라는 처음의 가정과 일치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내용이 있을 그대로의 모습과 100% 일치하는 정확한 진리이면 일수록 그 내용과 다른 모습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0%로 되는 관계에 있게 된다. 결국 앎이 100% 정확하게 진리의 내용이면, 그것과 어긋나는 모습을 나타내게 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미래에 대해 파악한 100% 정확한 진리와 다른 내용으로 미래를 변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계는 마치 과거의 모습을 100% 정확히 알더라도 그 내용과 다르게 과거의 모습을 변경할 힘을 갖지 못하는 상태와 같다. 물론 부정확한 예측이라면 그 예측과 다른 모습을 만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만큼 부정확한 진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미래에 대한 100% 정확한 진리의 내용은 그 내용과 다른 모습을 나타나게 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하는 ‘무력한’ 앎이 된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정확하게 진리를 파악하면 할수록 선택의 가능성도 넓어지고 그 뜻의 실현가능성도 넓어진다는 앞서의 내용과는 약간은 모순되는 결과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이런 모순은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우선 이런 가정은 현실적으로 경험세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실제로 경험 관찰을 통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밝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단지 어떤 가정을 하고 그 상태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는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정을 받아들일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100% 정확하게 미래를 예견할 때, 그 예견한 내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예견된 미래에는 그런 지적능력이 없는 상태일 수도 있고 또는 여전히 그런 지적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만일 미래에 그런 지적능력을 결여한다면, 그 상태에서 또 다른 기준으로 선택행위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미리 보고 그것을 바꾸고 싶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점에는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 미래시점에 그런 지적능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편 만일 미래에도 여전히 높은 지적능력을 갖고 있다면, 그 상태에서 넓은 실현 가능성을 가지고 그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상태를 선택하려 할 것이다. 단지 그런 선택의 결과를 그 이전에 미리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그 미래의 선택내용을 현재 다른 내용으로 바꿀 수 없겠지만, 그 미래의 순간이나 현재의 순간에 각기 넓은 가능성을 갖고 선택해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예견력이 높아진다고 그에 비례하여 선택의 가능성이 좁아지는 것이라고 당연히 봐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는 극단적으로 진리를 완전히 안다고 할 때 생각해낼 수 있는 문제점을 검토해보았다. 이런 논의는 현실적인 논의는 아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에 대한 앎의 극한은 어떤 상태인가를 추리해보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마) 현실적인 목표





현실에서 파악할 수 있는 진리의 내용은 경험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앞의 논의를 바탕으로 논의할 점은 현실이다.  





문제를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보면 우리가 많은 진리를 파악하면 할수록, 실현가능성이 있어서 선택 가능한 범위는 넓어지고, 또 일단 선택한 뜻을 실현시킬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극한으로 추구한다고 할 때 어떤 상태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 것이다. 그 추리의 결과는 우선 진리를 무한히 안다고 반드시 어떤 희망이던지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곤란함을 먼저 보았다. 또 반대로 결정된 미래 모습을 미리 보기 때문에, 그와 다른 모습을 선택하고 실현시킬 가능성이 오히려 좁아진다는 생각도 곤란함을 보았다. 단지 선택 가능한 범위는 많아질 것이며, 한편으로는 선택한 뜻을 실현시킬 가능성도 높아지며, 그래서 선택하고 실현해갈 것이며, 그리고 좀 더 완벽하다면, 그런 내용까지도 미리 스스로 예견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고 추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진리의 가치를 따질 때, 대부분의 사람이 갖지 못하는 고도의 진리파악능력을 기준으로 잡고 평가할 수는 없다. 즉 경험상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평균적인 지성을 기준으로 놓고 진리가 갖는 가치를 논의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할 때 반드시 실현가능한 것만을 선택해야 할 필연성은 나오지 않는다. 즉, 분명 실현되지 않는다고 알아도 그런 희망을 추구하여 일부러 실패를 선택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보다 중요한 점은 가장 자신에게 오래 좋은 상태를 추구한다는 필연성도 없다는 점이다. 


진리를 많이 앎은 어떤 현상의 변화내용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많이 파악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진리를 많이 알게 되면 반드시 자신에게 좋음을 가장 많이 주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진리를 많이 알면 다른 주체를 모두 고려하여 이들에게 가장 많은 좋음을 오래 주는 상태를 추구한다는 필연성도 없다. 물론 이런 가치판단과 목표 선택과정에서의 규범적인 지식까지도 진리의 내용에 포함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앎과 선택행위 그리고 의지형성과 실천행위의 내용이 반드시 일치한다는 필연성은 확보할 수 없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진리의 내용을 많이 앎과 함께 선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그런 선의 방향에 일치하는 선택행위 및 그에 따른 실천행위가 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진리의 파악이 가능한 범위에서 선에 일치하는 선택과 행위가 이뤄지도록 항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끝 http://blog.paran.com/truth007/18449970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7





http://blog.paran.com/truth007/18449958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8





바. 주체의 구성요소의 변화 





어떤 앎은 다른 감각이나 자극과 같이 인간에게 일정한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그런 앎은 다른 경험과 같이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얻은 사람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변화시키며 더 나아가 그 가운데 일부는 그 사람을 전체적으로 구성하는 한 정신적 육체적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기다랗고 징그러운 벌레를 본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피부에 소름이 돋을 수가 있으며 놀람 때문에 심장이 마구 뛰는 변화[반응]를 일으킬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런 경험은 그 사람을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과 다른 형태로 변화시키게 된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 가운데 어떤 것은 일시적으로만 머무르며 그 사람의 외부로 배출되는 내용도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감각하는 내용이 이런 형태로 영향을 끼치며 또 이후에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고 생각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어떤 경험은 그 이후 그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신적, 육체적 요소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앞의 예에서 그 사람이 놀란 나머지 넘어져서 발을 다쳤다고 하자. 그 상처는 육체에도 남을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런 경험은 그 사람이 이후 어떤 기다란 물체만 보면 과거의 그 벌레를 생각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그런 경험을 갖지 않는 사람이 동일한 사물에 반응하는 형태와 다른 형태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어떤 다른 사람과 그처럼 서로 다른 반응을 하게 하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인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추리할 수 있는 것이다. 앞의 예는 단순한 감각과 자극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예로 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진리판단은 이런 경험보다 조금 더 복잡하게 발전한 형태의 정신적 내용이라고 할 것이다. 감각이 개념으로 처리되고 다시 그 개념과 개념을 관련시켜 일정한 판단을 얻어내고 또 그것이 언어의 형태로도 표현되는 등으로 많은 처리를 거친 결과로서 어떤 진리판단이 얻어진다. 그리고 이런 진리판단도 앞의 예의 경험들처럼 그것을 얻지 못한 사람과 차이나는 형태로 반응하게끔 사람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그 사람의 전반적인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로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식물이 갖는 약효에 대한 지식을 갖춘 이가 있다고 하자. 그는 처음 그 지식을 얻을 때 어떤 기쁨이나 놀람의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또 그 이후에 그는 많은 식물들을 대하면서 그 식물에 대한 지식을 갖추지 않은 이와는 적어도 다른 반응을 하게끔 그 자신이 일정하게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진리가 이처럼 그것을 얻는 이를 얻지 못한 이와 다르게 일정하게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을 구성하는 하나의 정신적, 육체적인 요소로 변화해 간다는 것은 진리가 갖는 가치를 생각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엄밀히 생각하면 거짓된 내용들도 이런 기능을 전혀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핀 것처럼 진리는 가치판단내용의 적절성과 목표의 현실적 실현성의 정도에서 허위의 내용과 차이를 갖는다. 그리고 그 차이만큼 한 주체가 갖는 행위 반응체계를 다른 내용으로 형성하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진리에 토대할수록 보다 적절하게 가치판단을 하게 되고 보다 현실성있는 목표설정과 설정된 목표의 실현과정을 보다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인격 체계가 구성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인격 체계가운데에서 진리에 토대한 인격 체계에 좀 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진리는 곧 그와 같이 한 주체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런 인격상태를 지향할 경우 진리는 이런 목표를 이루는 수단이 되어준다. 





한편 어떤 진리를 습득하였을 때 그것이 그 주체에게 어느 정도 오래 지속적인 요소로 남게 되는가는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어떤 음식물을 섭취 소화하였을 때 그 음식물의 부분이 신체에 얼마나 오래 남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 음식물의 일부는 배설되어 내버려지고, 또 어떤 부분은 신체를 구성하는 필수부분이 되어 일정기간 지속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지식, 진리의 내용도 이런 물질적 요소와 같은 변화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또 예를 들어 기억상실 감퇴 등의 현상이 나타나면 과거에 체득한 지식은 소멸되어 없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사람의 사후에도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을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여기에는 사후의 상태에 대한 이론이 나뉘는 것처럼 다양한 견해를 세울 수 있다. 다만 생전에 행한 선악이 사후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입장에서는 생전에 얻은 진리도 어떤형태로든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물론 사후의 상태에는 그 주체는 전혀 없는 무(無)의 상태로 된다는 입장에서는 생전에 쌓은 지식체계는 오직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보게 될 것이다. 








3. 여론 


진리의 가치,  진리추구의 이유, 진리의 중요성, 진리를 얻는 원인과 결과




http://blog.paran.com/truth007/18449958k0360
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8





b=


bb=


참고-z90


/K360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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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 (효용)

++ h29 첨가시작 2000년10월29일(일)18시01분 +

 **> /K/7P/711-RELI/B-BUD/39b-inmyung/nyayab50.hwp 

k0360_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_01




●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 
○ 서 


Ω♠문서정보♠Ω

™[작성자]™ Pun tarika

◑[작성일]◐ 2014-01-15-수-20-11

♨[수정내역]♨

▩[ 디스크 ]▩ [DISK] ○ 서 o:\G\G\09\tvgn\K360.htm ♠●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
ж[ 웹 ]ж [web] http://truth007.tistory.com/321 ♠●현상의 진리의 인정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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